5화
‹ ›다음 날 아침, 여관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유독 눈부시다고 느껴질 만큼 몸이 무거웠지만, 나는 애써 그 느낌을 무시하고 리나와 함께 다시 노예시장으로 향했다.
어제 눈여겨봤던 몇몇 우리를 다시 둘러보기 위해서였는데,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리나를 사고 남은 돈은 정말 쥐꼬리만큼도 안 됐다. 주머니 속 동화를 세어보니 딱 여관 하루치 숙박비와 국그릇 두어 개 값 정도. 이대로는 노예시장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한 일은 다시 의뢰였다.
모험가 길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제와 똑같은 접수처 여직원이 나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빛에 담긴 말은 뻔했다. 또 왔네, 저 미친놈이. 하지만 옆에 서 있는 리나를 보는 순간 그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어제까지 나무 막대기를 든 채 어색하게 서 있던 소녀가, 오늘은 뭔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슬라임보다 조금 더 어려운 의뢰를 받았다. 대상은 고블린 무리, 셋이서 근교 마을을 위협한다는 의뢰였다. 보상은 은화 3냐. 여직원은 여전히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죽어도 자기들 손해는 아니었으니까. 이 바닥 인심이 원래 이런 건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말이 길어지면 곤란한 상황이었으니.
고블린 서식지는 수도 외곽 숲 깊은 곳이었다. 숲길을 따라 걷는 내내 리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낡은 검의 손잡이를 몇 번이고 고쳐 잡으며, 뭔가를 곱씹는 표정이었다.
"떨려요?"
내가 묻자 리나는 잠깐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 대신 낯선 종류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아니요. 그냥……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나는 안전한 거리에서 지켜보는 역할이었고, 리나가 실질적인 전투를 맡았다. 출발 전 나는 리나에게 미소국을 세 그릇 연달아 먹였다. 그릇을 채울 때마다 손끝에서 뭔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리나는 고블린 세 마리를 상대로 압도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나무 막대기 대신 어제 사둔 낡은 검을 휘두르며, 고블린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목을 베어냈다. 첫 번째 고블린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두 번째 고블린은 도망치려다 등을 베였고, 세 번째 고블린은 무기를 놓친 채 무릎을 꿇었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세 마리 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물처럼 유연했고, 푸른빛 꼬리가 균형을 잡듯이 흔들리는 모습은 거의 예술적이었다. 나는 나무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게 정말 어제까지 나무 막대기 하나로 벌벌 떨던 그 애가 맞나. 사람이, 아니 정확히는 종족이 다르다지만,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끝났어요."
리나가 검을 털며 돌아왔다. 표정에는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지만, 눈빛만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자신감이라는 게 뭔지 이제 막 배운 사람의 눈빛이었다.
의뢰 성공으로 은화 3냐를 받았다. 처음으로 손에 쥔 진짜 돈다운 액수였다. 손바닥에 놓인 은화 세 개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잠시 뭉클해졌다. 슬라임 잡던 시절이 벌써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으니까. 나는 그 돈으로 노예시장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 데려온 건 두 명이었다. 하나는 창술 기프트를 가진 붉은 머리 소녀였고, 다른 하나는 궁술 기프트를 가진 은발 소녀였다. 둘 다 대식 디버프를 가진 탓에 헐값에 팔리던 아이들이었다. 각각 동화 4천 냐 정도였다. 노예상은 이번에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놈이 또 재고 처리를 해주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두 소녀에게도 똑같이 미소국을 먹였다. 결과는 리나 때와 다르지 않았다. 붉은 머리 소녀는 창을 쥔 순간 몸에서 옅은 붉은 빛이 새어나왔고, 그 빛이 창끝을 타고 흐르는 걸 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은발 소녀는 활을 쥐자마자 백 미터 밖의 나뭇가지를 정확히 꿰뚫었다.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이 거의 직선처럼 보일 정도였다.
"됐다."
나는 그 순간 확신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재현되는 시스템이었다. 대식 디버프와 검술이든 창술이든 궁술이든, 어떤 전투 기프트가 함께 있는 소녀에게 미소국을 먹이면, 그 디버프가 폭발적인 힘으로 전환됐다.
첫 번째, 리나. 두 번째, 소하. 세 번째, 예은.
패턴은 명확했다. 대식 디버프, 전투 기프트, 미소국. 이 세 가지가 만나면 무언가가 폭발적으로 각성했다. 그런데 그 대가는 뭘까. 나는 그 질문을 아직 제대로 붙잡지 못한 채 다음 순간으로 넘어갔다.
"이름은 뭐예요?"
리나가 두 소녀에게 물었다. 붉은 머리 소녀는 소하, 은발 소녀는 예은이라고 답했다. 둘 다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방금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에 더 놀란 눈치였다. 소하는 자기 손바닥을 몇 번이고 들여다봤고, 예은은 활시위를 만지작거리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주둔기사단이야." 리나가 담담하게 소개했다. "저기 저 사람이 단장님이고."
소하와 예은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 속에는 의심과 기대가 반쯤 섞여 있었다. 이 이상한 남자가 정말 자신들을 구해준 건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노예살이가 시작된 건지 판단이 서지 않는 듯했다.
인원이 늘어난다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그만큼 미소국을 만드는 횟수도 늘었다. 그날 오후, 세 소녀에게 각각 서너 그릇씩 먹이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지러웠다. 눈앞이 잠깐 흔들렸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는 벽을 짚고 서서 겨우 버텼다. 시야가 흐려지는 순간, 방 안의 촛불이 세 개로 겹쳐 보였다.
"단장님?" 리나가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오늘 거의 걷지도 않았다. 그저 손을 오므려 국그릇을 만들어냈을 뿐인데, 몸이 이렇게까지 소모될 이유가 없었다. 슬라임을 삼십 마리쯤 때려잡은 것도 아니고, 산을 하나 넘은 것도 아닌데.
소하와 예은은 그런 나를 멍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아직 이 이상한 집단의 규칙을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날 밤, 여관 방구석에 누워 곱씹어봤다. 미소국을 만드는 횟수와 내 체력이 뭔가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무한 생성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정말 공짜로 무한한 게 있을까. 이 세계 어디에도 그런 법칙은 없어 보였다.
무한 취식 생성. 그 스킬 이름을 다시 곱씹었다. 무한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불안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씨발, 이것도 예외는 아니었던 건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리나가 급히 방문을 두드렸다.
"단장님, 큰일 났어요."
리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문을 열자 리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는데, 평소의 무표정 대신 명백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근처 도적단이 우리가 사들인 애들 소문을 들었대요. 장칠구라는 두목이 있는 도적단인데, 이 지역에서 상인들 갈취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데…… 그쪽에서 우리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요."
장칠구.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우리가 아직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 지역의 강자가 우리 존재를 알아챈 것이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고,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느낌이었다.
소하와 예은도 그 이름을 듣고는 표정이 얼어붙었다. 도적단이라는 단어 하나에 몸을 움찔거리는 걸 보니, 이전 삶에서 뭔가 좋지 않은 경험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장칠구가…… 어느 정도 세력이야?"
내가 묻자 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상인 몇 명이 그 이름만 듣고도 짐을 싸서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나는 그 순간 아직 몰랐다. 이 도적단과의 첫 충돌이, 우리 기사단의 진짜 실력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대가로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 얼마나 더 커질지도,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