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작은 아가씨를 지하 서고로 옮겨야 합니다."
박노식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목소리 톤만으로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 그는 나한테 존댓말을 쓸 때도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문장 끝이 다 갈라져 있었다.
하녀 둘이 나를 급히 안아 올렸다.
한 명은 팔 밑을, 한 명은 다리를 받쳐 들었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속도가 어른 걸음으로도 빨랐다.
계단 하나 내려갈 때마다 몸이 살짝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고, 그 진동이 그대로 배 속까지 전해졌다.
지하 서고는 책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인 어두운 방이었다.
곰팡이 냄새 비슷한 게 은근히 섞여 있어서, 여기 관리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순간 스쳤다.
···지금 그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조금만 계세요. 소리 내시면 안 됩니다."
하녀가 문을 닫고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철컥, 하는 그 소리 하나에 어깨가 움찔했다.
혼자 남은 나는 책장 사이 틈으로 위층 상황을 짐작하려 애썼다.
바닥은 차가운 돌바닥이었고, 앉아 있으니 엉덩이부터 냉기가 스며 올라왔다.
···이거 완전히 은폐 작전이잖아.
서버 점검 때 외부 감사관이 오면 로그를 급히 정리하던 그 기분이랑 똑같았다.
야근 수당도 안 주면서 새벽 세 시에 담당자 불러다가 로그 삭제하고 백업 파일 숨기던 그 회사, 갑자기 그리워지려 그랬다.
다만 이번엔 내가 그 로그 자체였다.
지워질 수도, 숨겨질 수도 있는 그 데이터.
세 살짜리 몸으로 이런 비유를 떠올리는 내가 제일 이상한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책장 틈으로 보이는 위층 바닥의 실낱같은 빛줄기가 유일한 정보원이었다.
발소리가 하나, 둘, 겹쳐 들렸다가 다시 멀어졌다.
위층에서 발소리, 인사말, 그리고 낮은 대화가 이어졌다.
또렷하게 들리진 않았지만, 목소리 하나가 유독 매끈했다.
방송국 아나운서 같은 발음, 감정 기복 없는 억양. 이런 목소리는 대체로 좋은 소식을 안 가져온다는 게 내 경험상 법칙이었다.
"설 가주, 오랜만입니다. 요즘 마력 이상 감응 보고가 늘어서, 왕실에서 각 가문에 조사를 지시했습니다."
"저희 가문은 특별한 이상이 없습니다."
설도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아까와는 다른, 훨씬 단단한 어조였다.
방금 전까지 서재에서 서류를 넘기던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 결이 바뀌어 있었다.
이 사람, 표정 관리는 몰라도 목소리 관리는 확실히 프로급이다.
"그렇습니까. 최근 대륙 서쪽에서 마력 폭발이 세 차례나 있었는데, 그 진동이 이쪽까지 감지됐습니다. 왕실 마법사원에서는 그것이 어떤... 봉인의 균열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봉인. 그 단어에 등이 서늘해졌다.
봉인이라니. 게임에서나 나오는 클리셰 단어가 실제로 튀어나오니까 오히려 실감이 안 났다.
【정보 : 세계 마력 균형 이상 감지. 근원 미확인.】
창이 떠올랐다. 이번엔 평소보다 문장이 길었다.
···지금 이거, 세계관 설정 노출인가. 그것도 이렇게 급박한 순간에.
타이밍 참 나쁘다, 이 시스템.
메뉴얼도 없고 튜토리얼도 없이 그냥 상황 한복판에서 던져주는 이 방식, 정말 배려라는 걸 모르는 개발자가 만든 게 틀림없었다.
위층에서 계속 대화가 이어졌다.
먼지 냄새 사이로 두 사람의 발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서재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이었다.
"봉인이 흔들리는 원인이 특정 개체의 마력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해서, 각 가문 소속 아동들의 마력 검진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저희 가문에는 하준이가 있을 뿐입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 저택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도 지금 이 순간, 지하 서고 바닥에 웅크려 앉아 숨소리조차 줄이려고 애쓰면서.
방문객의 목소리가 잠깐 멈췄다.
그 침묵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몇 초였는지 셀 수도 없을 만큼.
"···호적에 설 하린이라는 이름이 있던데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책장을 붙잡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 밑이 하얘질 정도로.
"먼 친척의 아이입니다. 곧 다른 가문으로 보낼 예정이라, 굳이 소개드리진 않았습니다."
설도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대단한 거짓말 스킬이었다. 저 사람, 회사에서 장애 브리핑 맡겼으면 잘했을 것 같다.
윗선한테 "서비스 정상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뒤에서는 서버 전체가 불타고 있는 걸 태연하게 숨기는 그런 부류.
방문객이 몇 초간 침묵했다.
이번 침묵은 아까보다 더 길었다. 뭘 판단하는 건지, 뭘 재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웠다.
"···알겠습니다. 다만 왕실에서는 조만간 모든 가문에 정례 검진관을 파견할 예정입니다. 아이가 있든 없든, 모든 방문객은 응해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기한은 보름 뒤입니다."
보름.
숨이 턱 막혔다. 그 안에 뭘 해야 한다는 소린가.
머릿속에서 숫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보름, 열닷새, 삼백육십 시간쯤. 회사였으면 프로젝트 마감이라고 하면 다들 야근각오 하는 그 기간인데, 지금은 내 정체를 숨기는 마감이라니.
방문객의 발소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갈 모양이었다.
인사말이 짧게 오가고,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 * *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고 문이 열렸다.
빛이 확 들어오면서 눈이 시렸다. 계속 어둠 속에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박노식이 안도 반, 초조함 반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안아 올렸다.
그의 손에서 미세한 떨림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대답은 짧았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박노식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뭔가 안심한 듯도 했지만 완전히 놓인 건 아닌 그런 숨소리.
위층에 올라가니 설도현이 서재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표정이 어제보다 몇 배는 어두웠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뭉치가 아까보다 늘어나 있었다. 방문객이 다녀간 자리에 뭔가를 더 남기고 간 모양이었다.
"보름이라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낮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톤보다도 지쳐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그는 급히 표정을 고쳤다.
"하린아, 이리 온."
무릎에 앉히더니 조용히 안아줬다.
따뜻했다. 그런데 그 온기 아래로 떨림이 느껴졌다.
옷 너머로도 전해지는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빨랐다. 이 사람도 무섭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앞으로 조금 더 자주 봐야 할 것 같구나."
"검진관 때문에?"
순간, 그의 몸이 굳었다.
무릎 위에 앉은 내 몸까지 그 경직이 전해질 정도였다.
"···어떻게 그걸."
"들었어요. 지하실에서."
[동요 폭 상승.]
대괄호 목소리가 또 끼어들었다.
이 타이밍에 또 끼어드는 이 시스템, 진짜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이러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설도현이 나를 빤히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세 살짜리가 저런 단어를 이해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 신호였을 거다.
그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는 걸 봤다. 뭔가 계산하는 듯한, 그리고 그 계산이 무서운 결론에 닿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린아. 앞으로 그런 얘기 들으면,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왜요?"
"그건···."
그가 말을 삼켰다.
박노식과 하준에게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벽이었다.
다들 나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고, 그 무언가는 보름 안에 어떤 식으로든 터질 예정이었다.
그 벽 앞에서 나는 항상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물어보면 말을 삼키고, 다시 물어보면 화제를 돌리고. 이 저택 안의 모든 어른들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음 이벤트 : 정례 마력 검진. 예상 위험도 : 높음.】
창이 조용히 사라졌다.
위험도 높음이라니. 이렇게 대놓고 경고를 해주는데도 정작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안 알려주는 이 시스템, 진짜 얄밉기 짝이 없었다.
···보름. 그 안에 나는 이 마력을 숨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설도현의 품 안에서, 나는 조용히 그 숫자를 되새겼다.
열닷새.
그 안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이 저택 전체가 나 때문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