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성승, 요괴와 걷다

1화

삐이익. 헤드셋 안쪽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체력 12%. 즉시 후퇴를 권장합니다.】 웃기는 소리였다. 후퇴할 길이 있으면 내가 여기 이러고 있겠냐. 던전 이름은 '서천로 지하 12층'. 길드에서 반년째 못 뚫은 구간이었고, 나는 오늘 그 벽을 부수겠다고 회사에 병가까지 냈다. 병가 사유는 '급성 장염'이었다. 팀장이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되묻지는 않았다. "이번엔 진짜 뚫는다." 혼자 중얼거리면서 방패를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VR 슈트가 체온을 조절해준다지만, 이런 긴장은 조절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쿵쿵거렸다. 거대한 멧돼지 형상의 몬스터가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왔다. 저놈 이름이 '광란의 멧돼지 대장'이었나. 아니, '광포한'이었나. 이름 외울 정신도 없었다. 콰앙! 방패를 든 팔이 저릿했다. 뼈까지 울리는 충격이었다. "아, 씨—" 입에서 튀어나온 반말이 마이크를 타고 파티 채팅에 그대로 박혔다. [현우 님, 진정하세요. 아직 회복 스킬 쿨타임 8초 남았습니다.] 길드 부길드장 목소리였다. 이 게임엔 원래 저런 상냥한 안내 목소리가 없는데, 얘는 유독 존댓말을 놓지 않았다. 성격이 그런 건지, 관리자한테 잘 보이려는 건지는 몰라도. 언젠가 술자리에서 물어봤더니 "습관입니다"라고만 답했다. 그 습관, 던전 안에서도 유효한 모양이었다. "8초를 어떻게 버텨요, 지금!"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스마트워치가 진동했다. 액정에 아내 이름이 떴다. 한지은. 무시했다. 지금 이걸 받으면 100% 잔소리다. 게임 좀 그만하라느니, 이번 달 생활비가 어쩌고, 장모님 생신이 어쩌고. 사실 다 맞는 말이었다. 게임에 쓴 돈이 이번 달 신용카드 값의 절반은 될 거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받으면 컨트롤이 흐트러지고, 컨트롤이 흐트러지면 죽는다. 워치가 다시 울렸다. 또 무시했다. 멧돼지가 뒷다리로 땅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돌진 준비 자세였다. 이건 패턴집에서 본 적 있다. 3초 후에 온다. 세 번째로 울렸을 때 나는 손목을 아예 매트리스 밑으로 밀어 넣었다. "미안, 지금은 안 돼." 혼잣말이었다. 아무도 안 들었을 거다. [현우 님?] 부길드장이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목소리를 낮췄다. [서버 지연 신호가 이상합니다. 렉이 아니라······.] 그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 존댓말은 그대로였는데, 그 안에 뭔가 얇은 실금이 가 있는 느낌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흔들렸다. 화면 전체가 초록빛으로 번쩍였다. 【경고: 인스턴스 데이터 손상. 접속을 종료할 수 없습니다.】 ···뭐? 헤드셋을 벗으려고 손을 올렸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통째로 굳었다. 이거 버그야, 라고 생각했다. 버그 신고 게시판에 뭐라고 써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잠깐 스쳤다. 상황 파악이 덜 된 거였다. 멧돼지 몬스터가 다시 돌진해 왔다. 이번엔 피할 수가 없었다. 철퍽. 방패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새하얗게 타올랐다. [현우 님, 로그아웃—] 부길드장의 목소리가 늘어지며 뭉개졌다. 뜨거운 통증이 배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진짜였다. VR 진동 슈트로는 절대 이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슈트 매뉴얼 어디에도 이런 통증 재현 기능은 없었다. 나는 그 매뉴얼을 세 번쯤 읽었다. 확실했다.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이거 뭐야······" 같은 말을 세 번쯤 되뇌었을 때, 세상이 완전히 검게 꺼졌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 오늘도 지은이한테 전화 못 받았네. 그거 하나였다. 회사 일도, 생활비도, 멧돼지도 아니고, 그냥 그거.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눈을 뜨기 전에 냄새부터 맡았다. 흙냄새, 젖은 풀 냄새, 그리고 멀리서 나는 향냄새. PC방 특유의 라면 국물 냄새가 아니었다. 공기 중에 뭔가 탄 냄새도 섞여 있었다. 향인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 태우는 냄새인지 구분이 안 됐다. ···망했다. 눈을 떴다. 하늘이 이상하게 넓었다. 구름이 실사 그래픽보다 진짜 같았다. 아니, 이게 진짜였다. 눈이 시렸다. VR 렌더링에서는 눈이 시린 느낌까지는 구현이 안 된다. 그건 확실히 알았다. 나는 그 회사 게임을 삼 년째 하고 있었으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사부님이라니. 태어나서 그런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현우 씨'였고, 게임에서도 '현우 님'이었다. 사부님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호칭인가. 고개를 돌리니 창을 든 거대한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팔뚝이 내 허벅지보다 두꺼웠다. 키가 최소 2미터는 될 것 같았다. 손에 든 창은 내 방 천장 높이만큼 길었다. 【대상: 강마천. 전 창술 영웅의 화신.】 시야 한 귀퉁이에 낯익은 초록빛 글자가 떴다. 게임 UI였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어제까지 파티 상태창에서 보던 그 폰트로. ···이거 설마 아직 게임 안이야?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훨씬 마음 편한 답이었으니까. 로그아웃이 안 됐던 거고, 지금은 데이터 손상 때문에 이상한 화면이 뜬 거고, 조금 있으면 GM이 튀어나와서 죄송합니다 어쩌고 하면서 보상 아이템 하나 던져줄 거고. 그런 상상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려는데, 진짜 근육통이 느껴졌다. 허리가 뻐근하고, 입안에 흙이 씹혔다. 게임에서 흙을 씹을 리는 없다. 씹혔다. 진짜로 씹혔다. 어금니 사이에서 모래 알갱이가 갈리는 소리까지 났다. 나는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져봤다. 코가 있었다. 눈썹이 있었다. 다 있었는데, 감촉이 이상했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너무, 너무 생생했다. "사부님?" 강마천이라는 그 거대한 사내가 다시 나를 불렀다.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저 덩치가 나를 사부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 상황 전체보다 더 이해가 안 됐다. "저기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목이 말랐다. 물 한 잔이 간절했다. "제가··· 사부님이 맞나요?" 물어보면서도 내 목소리가 우스웠다. 이 상황에서 그딴 질문이 제일 급한 게 맞나 싶었다. 강마천이 눈을 크게 떴다. 그 표정이 마치 세상이 뒤집힐 소식을 들은 사람 같았다. "기억을··· 잃으셨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창을 쥔 손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기억을 잃었냐고? 나는 서천로 지하 12층에서 멧돼지한테 배를 뚫렸다. 그리고 여기 있다.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는 거다. 차라리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는데, 입이 안 떨어졌다. 대신 시야 한 귀퉁이 초록빛 글자가 다시 반짝였다. 【안내: 귀속 완료. 백현우 님은 '구법승'의 육체에 완전히 정착하셨습니다.】 구법승? 그건 또 뭐야.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배는 멧돼지한테 뚫렸는데, 지금 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대신 다른 게 문제였다. 이 몸, 내 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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