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성승, 요괴와 걷다

2화

"사부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요괴 떼가 다시 몰려오고 있습니다." 강마천이 창을 고쳐 잡으며 소리쳤다. 요괴 떼라는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시커먼 형체들이 산비탈을 타고 굴러오듯 몰려오고 있었다. 늑대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형태가 애매하게 뒤섞인 것들이었다. 걸음걸이가 짐승인데 얼굴 윤곽은 사람이라 더 소름 끼쳤다. 【접근 개체 수: 17. 위협도: 중상.】 또 초록 글자가 떴다. 와, 이 세계관 진짜 게임식이구나. 던전 입구 안내판이랑 똑같이 뜨네. "저, 저게 다 뭐예요?" 존댓말이 튀어나온 건 반사였다. 상대가 창을 든 근육질 거한이면 일단 존댓말이 나가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덩치가 저 정도면 말투부터 낮추고 봐야지, 안 그러면 맞아 죽을 것 같다. 강마천이 눈썹을 찌푸렸다. "사부님답지 않게 왜 그리 물으십니까. 취경 원행 중 요괴는 늘 있는 일 아닙니까." 취경이 뭔데. 사부는 또 뭔데. 나는 방금까지 방패 들고 던전에서 도망치던 사람인데 갑자기 사부라니 부담스럽다. [현재 신체는 '구법승'의 몸입니다. 서천취경 설화의 주인공, 삼장의 화신입니다.] 귓속에서 낮고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게임에서 듣던 부길드장 목소리와 비슷한 톤이었다. 존댓말도 그대로였다. 이 목소리는 어디서든 예의를 안 잃는구나. "너, 너 누구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물었더니 강마천이 나를 더 이상하게 쳐다봤다. "사부님, 누구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이거 나만 들리는 거구나. 큰일 났다, 여기서 헛소리하는 미친 스님으로 낙인찍히면 곤란한데. [안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편의상 부르실 이름은 없습니다만, 필요하시면 만들어 주셔도 됩니다.] 이름 지어줄 여유가 어디 있어. 늑대 떼가 벌써 코앞이었다. 발소리가 땅을 울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콰앙! 선두에 있던 요괴가 강마천의 창에 꿰뚫려 나가떨어졌다. 창끝에서 검붉은 무언가가 튀었는데, 피인지 뭔지 구분이 안 갔다. 비린내가 확 끼쳤다. "사부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지시라니. 나는 방금까지 던전에서 방패 들고 도망 다니던 게임 중독자다. 뭘 지시해. 전략이라고 해봤자 도망치는 각도밖에 모르는데. 하지만 강마천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저런 눈으로 나를 보면 뭐라도 대답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든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뇌에서 뭔가가 자동으로 작동했다. 어릴 때부터 온갖 전략 게임을 했었다. 몹 어그로 관리, 탱커 배치, 딜러 사거리. 그 지식이 손끝에서부터 튀어나왔다. 이럴 때 쓰라고 배운 지식은 아니었는데. "강마천 씨! 아니, 강마천 형님! 좌측부터 끊어주세요. 한 줄로 몰아넣으면 뒤에서 협공당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스스로 놀랐다. 와,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거 완전 공격대장 멘트 아니야. 강마천이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창을 휘둘렀다. "명 받겠습니다!" 창대가 회전하며 늑대 형상의 요괴 두 마리를 동시에 걷어냈다. 저 사람 몸놀림이 무슨 액션 영화 주인공급이다. 나도 저런 몸이었으면 이 상황이 조금은 덜 무서울 텐데. 저 멀리서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형님, 저는요, 저는 뭐 합니까!" 뚱뚱한 체형에 짐승 귀가 달린 사내였다. 손에는 쇠막대기 하나 들고, 자세는 잔뜩 게을렀다. 저 자세로 전투를 한다고? 의심스러웠다. 【대상: 돈석. 짐승 형상 영웅의 화신.】 이 자는 요괴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딱 한 마리만 골라 때리고 있었다. 딱 봐도 편한 것만 골라서 하는 타입이다. 게임으로 치면 딜량 적게 넣고 파티원 뒤에 숨는 딜러 포지션이었다. "돈석 씨는 후방! 도망치는 놈들 마무리해요!" "편한 걸로 시키시네, 사부님도 참." 입은 삐죽거리면서도 몸은 잘만 움직였다. 쇠막대기가 휭휭 소리를 내며 도망치던 요괴 하나의 머리를 정확히 갈겼다. 말과 실력이 따로 노는 캐릭터인가 보다. 마지막으로 등 뒤에서 담담한 음성이 들렸다. "사부님, 짐과 말은 제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온화한 인상의 사내가 짐수레 옆에서 나를 향해 목례했다. 목소리에 억양 하나 흔들리지 않는 게, 저 난리 속에서도 심장이 안 뛰나 싶었다. 【대상: 목현. 목자 영웅의 화신.】 이 사람이 제일 정상인 것 같다. 일단은. 뭔가 있어 보이지 않고 조용히 자기 자리 지키는 게 제일 신뢰가 갔다. 전투는 십 분쯤 이어졌다. 강마천이 앞을 부수고, 돈석이 뒤를 정리하고, 목현이 짐을 지켰다. 나는 그 사이에서 그저 소리만 질렀는데, 이상하게도 상황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좌측 셋! 강마천 형님 그쪽으로!" "돈석 씨, 지금 뒤로 빠지는 놈이요!" "목현 씨는 그대로 있어요, 잘하고 있어요!" 마치 오랫동안 같은 파티로 던전을 돌던 사람들처럼 손발이 맞았다. 내가 뭔가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닌데, 그냥 게임 하듯 지시를 내리니까 다들 알아서 척척 움직였다. 이게 되네. 진짜로 되네. 마지막 요괴가 흙바닥에 쓰러지며 검은 안개로 흩어졌다. 조용해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손이 떨렸다. 아드레날린이 다 빠져나가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겼다······?" 강마천이 창을 어깨에 걸치며 씩 웃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했지만 표정은 여유로웠다. "사부님의 용병술이 오늘도 신묘합니다." 용병술이 아니라 그냥 오버워치 4년 한 짬입니다만. 탱커 앞세우고 딜러 배치하고 힐러 보호하는 거, 그거 게임에서 매일 하던 거잖아요. 입 밖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별거 아니었네요." 최대한 무게 잡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목소리 떨리는 거 안 들켰나 모르겠다. 돈석이 다가와 내 등을 퍽 쳤다. 힘이 어찌나 센지 앞으로 한 발 휘청거렸다. "사부님, 오늘 저녁은 저 마을에서 얻어먹을 수 있겠지요?" 마을이 있어? 어디에? 고개를 돌리니 저 아래 골짜기에 작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지 않는 게 좀 이상했다. 저녁 지을 시간인데. "저기 사부님,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강마천이 물었다. 내 표정이 벌써부터 굳어 있었나 보다. 뭔가 심각하게 이상한 냄새가 그 마을 쪽에서부터 풍겨오고 있었다. 연기 냄새는 아니었다. 피 냄새였다. 바람이 골짜기에서 불어올 때마다 그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며 짙어졌다. 방금까지 요괴 떼를 상대하며 맡았던 냄새와는 비교도 안 되게 진했다. 이거, 저녁 얻어먹으러 갔다가 진짜 뭔가 큰일 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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