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짜 성승, 요괴와 걷다

4화

잠이 든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상태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또 게임 하다가 밥때도 놓쳤지." 한지은이었다. 식탁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표정, 익숙하다. 눈썹은 살짝 치켜올라가 있고 입꼬리는 아래로 처져 있는데, 그게 화난 건지 서운한 건지 구분이 안 되는 그 표정. 결혼하고 삼 년째인데도 아직 완벽하게 해석은 못 했다. 집 부엌 냄새였다. 된장국 냄새, 마늘 냄새, 그리고 어딘가에서 밥이 타는 것 같은 냄새까지. 향냄새가 아니었다. 나무 타는 냄새도 아니었다. 이게 진짜였나. 아니면 지금 이게 진짜인가. "아니, 이번엔 진짜 어쩔 수 없었어. 던전에서······" "됐어. 매번 어쩔 수 없대." 지은이 한숨을 쉬며 국그릇을 내 앞에 탁 내려놨다. 된장국 속에서 감자 한 조각이 통통 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당신은 현실에서도 좀 지도자다운 모습 보여줬으면 좋겠어. 게임에서 파티장 하는 거 말고." 지도자다운 모습이라니. 지금 내가 진짜로 취경단 대표를 맡고 있다고 하면 믿을까. 아마 밥그릇을 내 머리에 씌울 거다. "내가 지금 얼마나 큰 일을 맡았는지 알면 놀랄 텐데." "또 무슨 헛소리." 지은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묘하게 그리웠다. 웃을 때 왼쪽 눈가에 잡히는 잔주름 하나까지. "당신, 요즘 왜 그렇게 게임에 매달려? 현실이 그렇게 싫어?"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조금 반가웠다고. 도망칠 곳이 생겨서. 회사에서 잘리기 직전이었다는 것도, 통장 잔고가 두 자릿수로 떨어졌다는 것도 다 말할 수 없었으니까.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지은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졌다. 목소리도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해졌다. "여보?" "어······ 잠깐만, 지은아." 손을 뻗었는데 잡히지 않았다. 손끝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고 그냥 공기만 만져졌다. 식탁도, 부엌도, 향냄새도 전부 스르르 흩어졌다. 감자 조각이 국그릇 안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튀어 오르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 눈을 떴다. 천장이 나무였다. 향냄새가 다시 코를 찔렀다. 눅눅한 나무 냄새와 어젯밤 태운 초 냄새가 섞여 있었다. 꿈이었나. 가슴이 이상하게 뻐근했다. 심장 어딘가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 진짜 존재하는 통증인지 아니면 몸이 새것이라 아직 낯선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일어나 앉으니 강마천이 이미 짐을 꾸리고 있었다. 등에 커다란 짐 보따리를 지고, 허리에는 검 한 자루를 차고, 눈빛은 아침부터 형형했다. 저 인간은 대체 몇 시에 일어나는 걸까. "사부님, 일찍 일어나셨군요." "······네." 목소리가 좀 잠겨 있었다. 목현이 다가와 두루마리 하나를 내 앞에 펼쳤다. 종이가 아니라 얇은 대나무 조각을 엮은 것 같은 재질이었다. "사부님, 오늘 출발 전에 이걸 다시 확인하셔야 할 듯합니다." 두루마리에는 낯선 글자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읽혔다. 이 몸이 원래 이 세계 문자를 아는 몸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마치 새 스마트폰을 켰는데 예전 계정 정보가 자동으로 로그인되는 느낌이었다. 【취경 원행 규정 제3조: 원행단은 정해진 기한 내에 서역 경전을 취해 돌아와야 한다. 기한을 넘길 경우, 단원 전원의 존재가 소멸된다.】 소멸이라니. "이, 이거 진짜예요?"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나왔다. 목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원행단도 기한을 넘겨 전원 소멸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이 몸을 얻은 것도 그 실패의 결과입니다." "실패의 결과라니요." "저희는 원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사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알긴 뭘 알아. 나 어제 이 세계 처음 왔어. 그것도 몸까지 통째로 바뀐 채로.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세상 다 아는 척, 뭔가 심오한 표정까지 지어가면서. [기한은 총 108일입니다. 현재 3일이 지났습니다.] 귓속 목소리가 친절하게 계산까지 해줬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108일. 그동안 못 채우면 다 죽는다. 나 하나 죽는 것도 아니고 저 셋까지 같이. 갑자기 던전에서 체력 12% 뜨던 순간보다 더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죽어도 로그아웃하면 그만이었는데, 여긴 로그아웃 버튼이 안 보였다. 강마천이 짐을 다 꾸리고 내 쪽을 돌아봤다. "사부님, 오늘은 산길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지도상으로는 위험 구간입니다만, 지름길이라 사흘은 아낄 수 있습니다." 돈석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큰 덩치를 흔들어대는 모습이 마치 곰 한 마리가 겁먹은 것 같았다. "형님, 위험 구간이면 그냥 돌아가면 안 됩니까. 저는 험한 길 싫습니다." "기한이 108일이라잖아. 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지." 강마천이 딱 자르듯 말했다. 목소리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돈석이 입을 삐죽거렸지만 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는데, 나는 모른 척했다. 어차피 결정권은 내게 없는 것 같았으니까. 나는 지도를 들여다봤다. 낡은 종이 위에 그려진 선들이 산세를 표현하고 있었다. 산길 표시 옆에 작은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다. 【표시 구간: 임서낭의 저택. 미망인 거주 확인.】 "임서낭이 누구예요?" 목현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 진지한 표정이 마치 무슨 학술 자료를 검토하는 것 같았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근방 마을 사람들 말로는 큰 재산을 가진 미망인이 산속에 홀로 산다고 합니다. 딸도 있다더군요." 돈석의 눈이 순식간에 반짝였다. 방금까지 산길 무섭다고 손사래 치던 놈이 저렇게 빨리 태도가 바뀔 수 있나. "딸이 있다고요? 예쁩니까?" 강마천이 그 뒤통수를 퍽 쳤다. 소리가 제법 경쾌했다. "이 와중에 그게 궁금하냐." "궁금할 수도 있죠! 사람이!" "우리 지금 존재 소멸 기한 걸려 있는 거 알지?" "아는데, 알면서도 궁금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둘이 투닥거리는 걸 보며 나는 지도를 다시 들여다봤다. 뭔가 이상했다. 재산 많은 미망인, 예쁜 딸, 산속 저택. 이 세 가지가 한 문장 안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뭔가 촉이 왔다. 이건 게임에서 백 번은 본 함정 이벤트 구조다. 재산 많고 예쁜 딸 있는 미망인 저택은, 열에 아홉은 몬스터가 사람 흉내 내고 있는 케이스거나, 최소한 저주받은 저택이거나, 아니면 지나가는 나그네 잡아먹는 요괴 소굴이었다.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강마천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갑자기 무게를 잡았다. "사부님도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저도 뭔가 께름칙합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ㅡ아니 사실 정확히 그런 뜻이었다. 게임 몇 년 해봤으면 이 정도 함정은 다 보인다. "어쨌든 조심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말을 살짝 돌렸다. 굳이 내 게임 경험을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목현이 두루마리를 다시 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지나가면 될 것입니다. 어차피 저택을 지나쳐 가는 길이니까요." 지나쳐 간다는 말이 왜 이렇게 불안하게 들리는지. 결국 우리는 산길로, 그 저택이 있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이 깊어질수록 향냄새는 옅어지고, 대신 달콤한 꽃향기가 짙어졌다. 너무 달콤했다. 설탕 녹인 것 같은, 인공적인 단내. 자연스러운 꽃향기라면 이렇게 진하게 코를 찌르지 않는다.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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