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레벨99, 해고당했습니다

1화

오늘도 못 죽었다. 서류 더미 사이에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거였다. 죽을 것 같았는데, 안 죽었다. 왕실 근위기사단 부단장 진하람, 25세. 오늘도 정상 출근 완료. 아니, 출근이 아니라 그냥 여기서 안 나갔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시편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라도] 칠십까지 못 갈 것 같은데요, 저는. 지금 이대로 가면 서른도 못 채울 것 같은 예감이 아주 강하게 드는 아침이었다. 목이 뻐근했다. 책상에 얼굴을 박고 잔 게 벌써 며칠째인지 세는 것도 그만뒀다. 목뼈에서 뭔가 우드득 소리가 났다. 이거 척추 나이만 마흔은 넘었을 것 같은데. 책상 위에는 결계 유지 보수 보고서, 국경 순찰 인력 배치도, 이번 달 기사단 재정 결산서, 그리고 신입 기사 채용 면접 결과지가 쌓여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넷. 혼자서. 10년째. 결과지 맨 윗장은 침이 좀 묻어 있었다. 잠결에 흘린 모양이다. 지원자한테는 미안하지만 이 종이는 나중에 다시 뽑아야 할 것 같다. 원래 근위기사단은 부서가 나뉘어 있다. 국방부서, 서무부서, 재정부서, 결계관리부서. 각각 부서장이 있고 인력이 배치되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넷이 전부 내 책상 위로 흘러들어왔다. 왜냐고? [전 단장님이 그러셨거든요. "하람아, 네가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 최영도 전 단장님은 참 좋은 분이셨다. 좋은 분이셨는데, 나를 갈아 넣는 방식으로 좋은 분이셨다. 처음엔 결계 관리만 맡겼다. 그러다 재정 담당이 도망갔다. 말 그대로 도망갔다, 야반도주. 그다음엔 서무 담당이 셋이나 연속으로 퇴사했다. 그리고 국경 순찰 인력은... 애초에 예산 문제로 충원이 안 됐다. 그때마다 최영도 전 단장님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같은 말을 했다. "하람아, 넌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는 말이 저주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작년에 은퇴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저거였다. 네가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뭘 어쩌겠나. 망하게 둘 순 없잖아. 그래서 10년째 이 짓을 하고 있다. 결계 유지 보수는 원래 대마법사급 인력 다섯 명이 붙어야 하는 작업이다. 나는 혼자 한다. 국경 순찰은 원래 백 명 단위 병력이 순환한다. 나는 혼자 돌 때도 있었다. 그때 몬스터 세 마리랑 마주쳤는데, 지원 요청할 곳이 없어서 그냥 혼자 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미쳤다. 재정 결산은... 사실 이건 그냥 내가 숫자를 잘 봐서 시켰다. 서무는 아무도 안 하려고 해서 떠맡았다. 누가 하려고 했겠나, 월급도 안 오르는데. 촤르르르륵! 서류 넘기는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유독 크게 울렸다. 창밖에는 벌써 해가 떴다. 밤을 새운 모양이다. 또. 이번 주만 세 번째다. [욥기 7: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밤은 가는데 일은 안 가네요. 욥도 나만큼 야근했으면 아마 신에게 사표 던졌을 거다. 기지개를 켜며 창가로 걸어갔다. 왕도의 아침 공기가 창틈으로 흘러들었다. 차갑고, 맑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좋은 냄새다. 이 냄새를 맡을 여유가 있다는 것도 사실 오늘이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진 부단장." 문이 벌컥 열리며 목소리가 들렸다. 신임 단장, 설현우였다. 설가(薛家) 후작가의 셋째 아들. 취임 두 달 차.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세 번이나 이런 식으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매너를 후작가에서 안 가르쳤나. 아니면 셋째라 신경을 안 썼나. "단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의는 지켜야 하니까. 사람이 짤리는 것과 인사를 안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설현우는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뭔가 불길했다. 사람을 이렇게 훑는 건 딱 두 가지 경우다. 빚 받으러 왔거나, 뭔가 트집 잡으러 왔거나. "자네 어제 결계 보수 보고서 올렸지." "네, 새벽 3시에 제출했습니다." "거기에 왜 내 서명이 없나." 나는 잠시 침묵했다. 서명이 없는 이유는 단장님이 서명란을 비워두고 퇴근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결재판을 책상에 던져놓고 "내일 봄세" 하고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직감이라는 게 있다. 10년 굴러먹으면 생기는 그런 직감. "단장님께서 결재 전에 퇴근하셔서..." "그럼 자네가 대신 서명을 받아왔어야지!" 뭐지? 이거 왜 내 잘못이 됐지? 서명은 본인이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대신 서명을 하면 그게 위조지 뭐가 되나. 설현우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서류를 흔들었다. 손이 떨렸다. 뭔가 감추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저 손 떨림, 딱 카드값 밀린 사람 표정이다. [출애굽기 32:22,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노하지 말라는데 벌써 노하신 것 같은데요. 아론은 그래도 상대가 진짜 신이니까 저렇게 빌었지, 나는 이걸 누구한테 빌어야 하나. "이거 때문에 어제 왕궁 감사관이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아나?"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결계 강도가 규정치보다 낮게 측정됐다더군!" 아, 그거. 그건 원래 낮았다. 왜냐하면 결계 유지 인력이 나 혼자였고, 나는 3일 전부터 42시간 연속 근무 중이었으니까. 마력이라는 건 배터리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출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한 거다.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인데 후작가 셋째 아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인간은 원래 마력이 무한하지 않다. 나도 인간이다, 아마도. "단장님, 그건 인력 부족 문제로 제가 이미 세 번 보고서를 올렸습니다만." 정확히는 세 번이 아니라 다섯 번이었다. 두 번은 서류가 반려도 없이 그냥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설현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아, 이거 보고서를 안 읽었구나. 그럼 그렇지. 읽었으면 저런 표정이 안 나오지. "닥쳐. 됐고." 닥치라니. 존댓말이 왜 갑자기 사라졌지?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문법도 같이 무너지는 모양이다. 설현우는 책상 위에 있던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앞으로 던졌다. 팔락, 종이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 "뭡니까 이건." 종이를 집어 들었다. [해고 통지서]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글씨체가 상당히 정갈했다. 미리 준비해온 게 분명했다. 즉흥이 아니라 계획이었다는 뜻이다. [욥기 1:21,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은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아니, 저는 지금 알몸이 아니라 근위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는데요. 갑자기 왜 성경 인용이 나오지 이 타이밍에. 누구냐, 지금 내 머릿속에 자막 넣는 놈. "진하람. 자네는 오늘부로 근위기사단에서 해고됐네." "...네?" "업무 태만, 상급자에 대한 불경, 결계 관리 실패의 책임을 물어 즉시 해고 조치야." 업무 태만이라니. 지난 10년간 나는 휴가를 세 번 썼다. 장례식 하루, 감기 하루, 그리고 나머지 하루는 결계 마력 소진으로 강제 실신했을 때였다. 그것도 휴가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실신도 태만으로 치는 건가 그럼. 상급자에 대한 불경은 또 뭘까. 아까 존댓말 쓴 건 나였는데. 설현우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지, 저 표정은. 죄책감인가. 아니면 그냥 초조함인가. 생각해보니 답은 뻔했다. 결계 강도 저하 보고가 왕궁까지 올라갔고, 감사관이 왔고, 뭔가 문책이 있었을 것이다. 문책의 화살이 자기한테 향하니까 그걸 나한테 떠넘긴 거다. 간단한 산수다. 윗사람 하나 잘리는 것보다 아랫사람 하나 잘리는 게 더 조용하니까. [야고보서 1:19, 성내기도 더디 하라] 더디게 성낼 시간도 없이 그냥 바로 해고를 하셨네요. 성경도 이 속도전을 못 따라간다. "단장님, 이건 좀..." "됐고! 자네 짐 정리해서 오늘 안에 숙소 비워. 알겠나?" 숙소까지. 10년 살던 방을 오늘 안에 비우라니. 짐이 많지도 않은데, 많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서글펐다. 설현우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쾅! 사무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서류 더미와, 결계 보수 도구와, 재정 결산철과, 방금 받은 해고 통지서 한 장. 손에 들린 종이를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해고. 10년. 하루아침. 이상하게도 눈물은 안 났다. 대신 뭔가 이상한 감각이 가슴 속에서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뭐지. 분노? 억울함? 아니었다. 뭔가 훨씬 더 낯선 감정이었다. 마치 10년째 매고 있던 배낭을 갑자기 누가 벗겨준 것 같은. 어깨가 이상하게 가벼웠다. 잘린 사람 어깨가 가벼워도 되는 건가.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때가 됐나 보다. 라고 생각하기엔 아직 이 감각이 뭔지 확신이 안 섰다. 하지만 어쩐지, 아주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책상 위 서류들을 한번 훑어봤다. 결계 유지 보수 보고서. 이제 내 일이 아니다. 국경 순찰 인력 배치도. 이제 내 일이 아니다. 재정 결산서. 이제, 내 일이 아니다. 세 번 되뇌었는데도 실감이 안 났다. 10년이면 이가 갈릴 만큼 익숙해질 시간인데, 놓는 순간은 왜 이렇게 낯설까. 창밖으로 왕도의 아침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좋은 날씨네. 해고당한 날 치고는. 숙소를 오늘 안에 비워야 한다는 사실이 갑자기 무겁게 다가왔다. 당장 오늘 밤부터 잘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10년 국가에 갈아 넣은 몸값이 방 한 칸 값도 안 나온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났다. 자,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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