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래서, 젊은 양반. 진짜로 마의 숲 변경까지 가시는 겐가?"
김덕수 할아버지가 마차 짐 사이에서 몸을 뒤척이며 물었다.
마차는 벌써 왕도를 벗어나 반나절째 흙길을 달리고 있었다.
"네, 정착할 생각입니다."
"정착? 거긴 사람이 정착할 만한 곳이 아닌데."
할아버지의 얼굴에 진짜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거기 마물이 얼마나 나오는지 알고 가는 겐가?"
"어느 정도인지는 대략.."
"대략이 아니라 자세히 알아야 혀. 근처 개척촌 세 곳이 작년에 마물 습격으로 통째로 사라졌어."
마물 습격으로 개척촌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왕도에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결계 보수 업무를 하면서 변경 지역 피해 보고서를 꽤 많이 읽었으니까.
그때는 종이 위의 숫자였는데, 지금은 내가 그 종이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셈이었다.
"거다가 최근엔 오크 무리 하나가 그 근방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이 있어."
"오크요?"
"보통 오크가 아니고, 우두머리가 있는 무리여. 그런 건 대충 스무 마리는 몰려다닌다니께."
스무 마리라니.
왕도 결계 보수를 하면서 마물 관련 자료도 많이 봤지만, 오크 무리 스무 마리는 정규 기사단 소대 하나로도 힘든 상대였다.
게다가 소대라는 건 보통 방패병, 마법사, 궁수까지 골고루 섞여야 굴러가는 조합이지, 검 한 자루 든 퇴직자 혼자서 어떻게 되는 규모가 아니었다.
[사무엘상 17:45,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가노라]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가야 할 판인데, 나는 검 한 자루랑 배낭 하나 들고 가는 중이었다.
다윗은 최소한 물맷돌이랑 자신감이 있었지, 나는 물맷돌도 없었다.
[전도서 9:10,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니]
힘을 다하라고 하는데, 사실 나는 은퇴한 몸이라 힘을 다하고 싶지 않았다.
퇴직금도 못 받은 은퇴자한테 힘을 다하라는 건 좀 가혹한 요구 아닌가.
"할아버지는 그럼 왜 그쪽으로 가시는 겁니까?"
"난 상인이잖어. 위험한 만큼 물건 값이 좋아. 개척촌 사람들한테 소금, 약재, 도구 팔러 가는 겨."
"장사 오래 하셨나 봐요."
"30년 넘었지. 이쪽 길만 20년을 다녔어."
김덕수 할아버지는 그러면서 마차 짐칸 안쪽에서 육포 몇 개와 마른 과일을 더 꺼내 나에게 건넸다.
"먹어, 지금 든든하게 먹어둬야 혀. 거기 가면 이런 거 구하기도 힘들어."
"감사합니다."
나는 육포를 씹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들판이 서서히 낮은 언덕으로 바뀌고 있었다.
왕도의 반듯한 도로 대신, 이제는 마차가 덜컹거릴 정도로 거친 흙길이었다.
길바닥에 박힌 돌 하나하나가 엉덩이로 다 느껴질 정도였는데, 왕도에서 포장도로 위만 걸어다니던 근위기사 시절엔 상상도 못 했던 감각이었다.
"근디, 자네는 뭐 하던 사람인가? 검을 차고 있는 걸 보면 기사 같은데."
할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전직 근위기사단 부단장이라고 하면 뭔가 복잡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상인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왕도 사교계보다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사였습니다. 얼마 전에 그만뒀습니다."
"그만둔 게 아니라 도망친 건 아니고?"
예리하시네.
"해고당했습니다."
"허허, 뭘 잘못했는가?"
"글쓰기를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기사가 글을 왜 잘 써야 혀?"
"보고서를 잘 못 써서요."
사실 보고서는 잘 썼다.
다만 그 보고서를 읽는 상관이 무능했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그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설명해봤자 돌아오는 반응은 "그래서 자네가 옳다는 거지?" 정도일 게 뻔했으니까.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설현우 단장은 그 잠언과는 정확히 반대의 사람이었다.
남의 권고 대신 자기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
내가 그렸던 결계 보수 계획서를 세 번이나 뒤집어 놓고, 결국 자기 방식대로 밀어붙여서 결계 하나를 통째로 날려먹은 것도 그 사람이었다.
그 얘기까지 하면 밤새도 모자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육포를 한 조각 더 씹었다.
마차가 다시 한 번 크게 덜컹였다.
김덕수 할아버지가 짐칸 벽에 몸을 부딪히면서 신음했다.
"에구구, 이 길은 갈 때마다 힘들어."
"괜찮으세요?"
"이 나이엔 뼈가 다 삭았어. 조금만 흔들려도 아프다니께."
마부가 앞에서 소리쳤다.
"손님들,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영합니다! 다음 마을까지 가려면 아직 한나절 더 걸려요!"
마차가 멈추고, 우리는 짐을 내려 야영 준비를 했다.
김덕수 할아버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텐트를 치고 불을 피웠다.
장사를 오래 한 상인답게 야영 준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말뚝 박는 각도, 불씨 놓는 위치, 바람 방향까지 확인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자네도 뭐 좀 해봐. 앉아만 있지 말고."
"뭘 도와드릴까요?"
"저기 물통 좀 채워와. 근처에 개울이 있을 겨."
나는 물통을 들고 마차 근처 숲 쪽으로 걸어갔다.
왕도에서 벗어나서 걸어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났다.
공기가 확실히 달랐다.
왕도의 공기는 늘 마법진 냄새랑 말똥 냄새가 반쯤 섞여 있었는데, 여기는 그냥 흙과 풀 냄새뿐이었다.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 중에서 심령이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낙이라는 게, 이렇게 별거 없는 순간에도 느껴지는 거였구나.
서류에 파묻혀 있던 지난 10년 동안은 몰랐다.
결재판 위에 쌓인 서류 더미보다는 확실히 이 물통이 더 가벼웠다.
개울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물소리를 따라 몇 걸음 걸으니 바로 나왔는데, 물이 어찌나 맑은지 밑바닥 자갈까지 다 보일 정도였다.
왕도 수로에서 본 흙탕물과는 차원이 달랐다.
물통을 담그고 물이 차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결계 보수 담당이었던 10년 동안,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개울에서 물을 채우고 돌아오는 길, 마차 옆에서 김덕수 할아버지가 불을 지피며 냄비에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오, 벌써 왔는가. 이거 좀 도와줘."
야채와 육포를 넣은 스튜였다.
간단하지만 냄새는 기가 막혔다.
왕도 고급 식당에서 먹던 크림 스튜보다 이게 더 당기는 걸 보면, 사람 입맛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싶었다.
"할아버지, 이 길 자주 다니시면 아까 말한 오크 무리도 만난 적 있으세요?"
"작년에 딱 한 번 봤지. 멀리서 도망갔어. 그때 다행히 호위 기사가 같이 타고 있었거든."
"이번엔 호위가 없네요."
"그러니 걱정이지."
할아버지가 나를 슬쩍 쳐다봤다.
"자네 검 쓸 줄은 아는가?"
"조금은요."
조금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겸손이 지나쳤다는 걸 곧 알게 되겠지만, 그때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10년간 서류만 봤으니 검을 얼마나 휘두를 수 있을지 나도 확신이 없었다.
근위기사단 시절엔 매일 새벽 검술 훈련이 필수였는데, 부단장으로 승진하고부터는 결재와 회의만 하다가 검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였다.
손바닥에 박였던 굳은살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스튜를 나눠 먹으며 밤이 깊어갔다.
하늘에 별이 유난히 많이 떠 있었다.
왕도에서는 결계 마법진의 빛 때문에 이렇게 별이 잘 안 보였다.
"이런 하늘은 참 오랜만이네요."
"왕도 사람들은 그런 소리 자주 하더구먼. 별이 이쪽 하늘엔 더 잘 보인다고."
김덕수 할아버지가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뭐, 위험한 만큼 그런 낙은 있는 곳이여. 다만 조심혀. 이 길, 밤에 특히 마물이 자주 나와."
"밤에요."
"그려. 낮엔 그나마 눈에 잘 뜨여서 도망갈 틈이 있는디, 밤엔 코앞까지 와도 몰라. 나도 이 길 20년 다니면서 몇 번 죽을 뻔했어."
할아버지가 파이프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불씨를 한번 더 살렸다.
불빛이 할아버지 주름진 얼굴 위로 일렁거렸다.
"자네, 그 검. 정말 쓸 수 있는 거지?"
"연습은 좀 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근위기사단에서 10년을 있었으니 몸이 완전히 기억을 잃었을 리는 없었다.
다만 그게 실전에서 얼마나 나올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 숲 쪽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부스럭...
할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저... 저건..."
나는 몸을 일으켰다.
검은 텐트 옆에 놓아두었다.
불빛에서 몇 걸음 벗어나 검을 집어 드는 순간, 손끝이 조금 떨리는 걸 느꼈다.
연습이라고 말했지만, 실전은 10년 만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
마치 누군가 숲 전체를 흔들어 놓은 것처럼, 소리가 사방에서 겹쳐 들려왔다.
말들이 갑자기 히잉, 하고 울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마부는 얼른 말고삐를 붙잡으려 뛰어갔고, 그 와중에 넘어져 흙바닥을 굴렀다.
[욥기 39:19, 네가 말에게 힘을 주었느냐]
말에게 힘을 줬냐고 물어보시는데, 지금 말은 이미 겁먹고 발을 구르고 있는데요.
말한테 필요한 건 힘이 아니라 진정제인 것 같은데요.
"저기 짐칸 안에 숨어 있으라."
나는 김덕수 할아버지에게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지는 순간 뭐라 하려다가, 내 눈빛을 보고 조용히 마차 짐칸 안으로 몸을 숨겼다.
평생 장사하며 온갖 위기를 넘겨온 노인의 감각이, 지금이 말을 아낄 때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숲 쪽에서 커다란 형체 여러 개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초록빛 피부, 조악한 무기, 커다란 덩치.
불빛에 반사된 눈동자가 하나씩 켜지듯 나타났다.
오크였다.
한 마리가 아니라, 최소 다섯 마리.
할아버지가 아까 말했던 스무 마리 무리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검을 고쳐 잡은 손바닥에, 10년 만에 식은땀이 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