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둠이었다.
빛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완전한 무(無).
그 안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생각이 먼저 돌아왔다. 몸은 아니었다.
손을 뻗으려 했지만 손이 없었다. 발을 딛으려 했지만 발이 없었다.
그저 의식만이 둥둥 떠서, 존재하지 않는 눈으로 존재하지 않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두렵지가 않았다.
두려움을 느끼려면 심장이 뛰어야 할 텐데, 뛸 심장조차 없으니 두려움도 함께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저 막막한 무게감만이 존재했다. 무게가 없는데도 무거웠다.
말이 안 되는 감각이었지만, 이 공간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곳이니 그 정도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시간이라는 개념조차 이곳에서는 무의미했다. 흐르는 것도, 멈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영원처럼 느껴지는 정지 상태가 계속되었을 뿐이다.
어느 순간 저 먼 곳에서 희미한 빛 한 줄기가 스며들었다.
촛불 같은 빛이었다. 흔들리고, 위태롭고, 곧 꺼질 듯한.
나는 그 빛을 향해 이끌리듯 다가갔다. 다가가는 방법 같은 건 몰랐지만 그냥 그렇게 되었다.
발을 딛지 않아도 움직였다. 헤엄치듯, 혹은 빨려들듯.
빛이 가까워질수록 기억이 하나씩 돌아왔다.
처음엔 파편이었다. 조각난 유리처럼, 무의미한 형태로 흩어져 있던 것들.
검을 쥔 손. 그 손에 익어 있던 굳은살의 위치까지 선명했다.
동료들의 웃음소리. 누군가는 크게, 누군가는 나지막이.
모닥불 앞에서 나눠 마시던 싸구려 술의 맛. 목구멍이 타는 듯 뜨거웠던 그 감각.
그리고—
가슴에 박힌 창.
숨이 끊어지던 순간의 온도.
차가웠다. 이상하게도, 살이 찢기는 고통보다 그 냉기가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나는, 죽었다.'
그 결론에 도달하자 오히려 이상하게 담담해졌다. 이미 지나간 사실을 확인한 것뿐이었으니까.
한서준. 그게 내 이름이었다.
마족 총수와의 결전에서,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나는 죽었다.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는 아직 흐릿했다. 다만 가슴 한켠이 타는 듯 뜨거워지는 걸 보면, 그것이 배신이었다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배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존재하지도 않는 몸 어딘가에서 통증이 스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이 없는데도 아플 수 있다는 것이.
'이유가 무엇이 됐든.'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지금은 그 문제를 파고들 여력이 없었다.
누가 나를 찔렀는지, 왜 찔렀는지, 그 얼굴이 누구였는지— 그 모든 것이 안개 속에 갇혀 있었다.
지금 확실한 건 딱 하나뿐이었다. 나는 죽었고, 지금 이곳은 그 죽음 이후의 어딘가라는 것.
빛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빛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촘촘하게 짜인 마법진. 붉은 잉크로 그려진 고대의 문자들.
문자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익숙한 문양이었다. 살아 있을 적, 마족 토벌 임무에서 몇 번인가 마주쳤던 사령술의 흔적.
그리고 그 중심에서 흔들리는 하나의 인기척.
누군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고, 손끝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이 마법진의 문자를 따라 스며들었다. 그것이 술식의 재료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숨을 쉬는 몸도 없는데 그런 기분이 들었다.
선유하였다.
내가 알던 그 얼굴보다 훨씬 야위었고, 눈빛은 유리처럼 텅 비어 있었지만, 분명히 선유하였다.
살아 있을 적 그녀의 뒷모습을 몇 번이나 지켜봤던가. 검을 맞잡고 함께 싸웠던 전장에서, 그녀는 언제나 등을 곧게 펴고 있었다.
지금 눈앞의 그녀는 그 등이 굽어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무언가를 짓눌린 채 버텨온 사람처럼.
옷자락도 낡아 있었다. 예전에 입던 견고한 술사복이 아니라, 여기저기 해진 천 조각을 겹쳐 기운 옷.
손끝의 굳은살은 그대로였지만, 손등에는 새로운 흉터가 여러 개 늘어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거지.'
의문이 스쳤지만 답을 낼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유하야.'
부르고 싶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이 없으니 성대도 없고, 성대가 없으니 목소리도 없었다. 당연한 이치였지만 그 당연함이 이렇게 답답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입술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오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주문의 리듬이 점점 빨라졌다. 마치 무언가에게 쫓기듯, 혹은 스스로를 몰아붙이듯.
마법진 중앙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소용돌이치며 솟아올랐다.
안개는 형체가 없었지만, 그 안에서 무수한 손이 뻗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안개가 향한 곳이 바로 나였다.
'저건 사령술이다. 나를…… 부르고 있는 건가.'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 술식이 나를 겨냥해 짜여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사령술이라면 죽은 자를 불러내는 기술이다. 그것도 상당한 대가와 정교한 계산이 필요한 고위 술식.
선유하가 이런 짓을 벌일 만큼 절박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 순간 선유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텅 비었던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이 스쳤다. 놀람, 그리고 뒤이어 극심한 경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폭이 점점 커졌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무언가가, 동시에 두려워하던 무언가가 눈앞에 나타난 사람처럼.
"……왔구나."
갈라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향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내가 있는 지점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반가움 같은 것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경계, 적의,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오래된 증오.
"드디어 걸렸어, 윕(Wyb)."
그녀의 손끝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어났다.
불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넘실거렸다.
'윕이라니. 그게 뭐지.'
내 이름이 아니었다. 한서준이라는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나를, 나로 알아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의 손이 나를 향해 뻗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