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년의 숨은 수호자

4화

며칠이 지났다. 그날의 침입자는 결국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물러났다. 문틈으로 스며들던 그 서늘한 기운도, 창밖을 맴돌던 낯선 시선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놓친 것뿐이다. 사라진 게 아니다.' 몸이 없는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없지만, 그날 밤 스며들었던 기운의 잔향만은 여전히 감각 어딘가에 눌어붙어 있었다. 선유하는 그 뒤로도 별다른 흔들림 없이 일상을 이어갔다. 아침이면 탑 아래 텃밭에서 약초를 뽑았고, 낮에는 낡은 마법서를 뒤적였고, 밤이면 다시 사령술 준비를 했다. 똑같은 순서, 똑같은 시간, 똑같은 무표정. 마치 하루가 반복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그녀는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그 곁을 계속 지켰다. 몸이 없는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물건을 살짝 흔들거나, 촛불을 조금 흔들리게 하는 정도였다. 한번은 책장을 넘기려던 그녀의 손끝을 따라 종이가 파르르 떨리게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마저도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눈치챘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지쳐 있는 건가.' 관찰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몸도 마음도. 식사는 하루에 한 번, 그것도 겨우 몇 술 뜨는 게 전부였다. 수프 그릇에 담긴 건 멀건 채소 몇 조각과 딱딱해진 빵 반쪽이었다. 그녀는 그것마저 절반도 비우지 못한 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잠은 거의 자지 않았다. 눕는 시간이 있긴 했지만, 그 시간에도 눈은 뜬 채 천장을 응시했다. 천장의 나뭇결을 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손등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가득했다. 마법 실험의 부작용이거나, 자해에 가까운 대가일 것이었다. 가느다란 칼자국 같은 흔적도 있었고, 화상처럼 붉게 부풀어 오른 자리도 있었다. 오래된 것도, 비교적 최근에 생긴 것도 섞여 있었다. 그 상처들을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타들어갔다. '이건 내가 만든 결과다.' 죽어서 그녀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게 나였다. 내가 살아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사령술 따위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이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동시에 그 감정을 행동으로 바꾸기로 했다. '지금부터라도 지킨다.' 말은 쉬웠다. 하지만 몸이 없는 자가 무엇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그 물음에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어느 날, 그녀는 오랜만에 탑을 벗어나 근처 마을로 향했다. 식료품과 약초를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바구니 하나를 챙겨 든 그녀의 걸음은 느릿했다. 마치 오랜만에 걷는 법을 다시 익히는 사람처럼. 탑에서 마을까지는 걸어서 반나절 거리였고, 그 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숲을 벗어나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낮은 지붕들이 옹기종기 늘어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는 눈치였지만, 다들 거리를 두었다. 빵집 앞에 서 있던 아주머니는 그녀가 지나가자 슬며시 문 안으로 몸을 숨겼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여인들도 대화를 멈추고 시선을 피했다. "저 마녀야. 건들지 마." 아이 하나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그 말을 받아 되물었다. "진짜 사람 죽여써?" "몰라. 그래도 가까이 가믄 안 된대." 아이들의 대화는 순진했지만, 그 순진함이 오히려 잔인했다. 선유하는 그런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걸음이 조금 빨라진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어깨는 곧게 펴져 있었지만, 턱 끝은 살짝 아래로 처져 있었다. '외로운 거다.' 천 년을 홀로 버텨온 사람이었다. 그 외로움의 깊이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천 년이라는 시간은 사람 하나가 몇 번이고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해도 다 채우지 못할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혼자 견뎌왔는지, 나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시장 골목을 지날 때, 나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정확히는 느낀 게 아니라, 뭔가 어긋난 감각이었다. 마치 맑은 물 위에 기름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주변 공기의 결이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골목 끝, 후드를 눌러쓴 한 남자가 선유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체격은 크지 않았다. 옷차림도 평범한 여행자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살갗 아래로 언뜻언뜻 비치는 검붉은 기운. 후드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에, 마치 실핏줄을 따라 번지는 것처럼 검붉은 빛이 미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마족의 잔재다.' 확신이 들었다.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마족의 힘이, 저 남자 안에 남아 있었다. 숙주가 인간인지, 아니면 인간의 몸을 빌린 다른 무언가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만 그 기운의 결은 낯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이미 마주쳤던 종류의 것이었다. 선유하는 아직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상점 앞에서 흥정을 하고 있었다. "이 약초, 좀 더 싸게 안 될까요?" "마녀님한테는 원래 가격에 팝니다. 더 못 깎아드려요." 상인의 말투에는 은근한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별다른 대꾸 없이 은화 몇 개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그녀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몸이 없는 나로서는 경고할 방법조차 없었다. 목소리도, 손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지켜보는 눈만이 나에게 남은 전부였다. '제발, 눈치채라.'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그녀는 여전히 상인과의 흥정에 집중하고 있었다. 후드의 남자는 미동조차 없이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만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적의인지, 갈망인지, 아니면 그 둘이 뒤섞인 무언가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간절한 바람이 무색하게, 후드의 남자는 천천히 골목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았다. '저놈, 다시 나타날 것이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주 좋지 않았다. 선유하는 흥정을 마치고 바구니를 고쳐 든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의 발걸음은 다시 탑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골목 안으로 사라진 그 기운의 자취를 계속 뒤쫓았다. '다음엔 놓치지 않는다.' 그 다짐이 얼마나 무력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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