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선유하는 재빨리 술식을 지웠다.
손가락 끝이 허공을 가르자 마법진의 선들이 빛을 잃고 스러졌다.
손짓 한 번으로 그 복잡했던 문양들이 흩어지는 재처럼 사라지고, 방 안은 다시 어둑한 촛불빛만 남았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걸린 낡은 지도와 빛바랜 서책들의 그림자가 함께 일렁였다.
"윕은 나중에 처리한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가로 다가갔다.
발소리는 조용했다. 마치 소리를 내는 법조차 잊은 사람처럼, 그녀의 걸음은 바닥을 스치듯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몸이 없으니 걸음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했지만, 의식만으로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림자도 없이, 온도도 없이, 그저 그녀의 옆자리에 존재한다는 감각만이 나를 이루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대지 위로, 마른 풀들이 바람에 쓸려 눕는 소리가 들렸다.
한때는 마을이었을 흔적—무너진 담벼락과 잡초에 덮인 우물이 남아 있었다.
우물의 돌 틀은 절반쯤 무너져 내렸고, 그 틈으로 검은 넝쿨이 기어오르듯 자라 있었다.
지붕이 있었을 자리에는 이제 하늘만 뻥 뚫려 있었다.
'천 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제 죽었던 것 같은데, 세상은 천 년을 앓았다.
내가 알던 거리, 내가 알던 사람들, 내가 알던 웃음소리—전부 저 잡초 아래 묻혀 흙이 되었을 것이다.
그 사실이 가슴 한복판을 스산하게 훑고 지나갔다.
'천 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이었다. 그저 어둠이었고, 그저 침묵이었을 뿐이다.
그녀가 창밖을 노려보며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들짐승인가."
그녀의 눈동자가 어둠 속을 훑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수백 년을 이렇게 경계해왔을 눈빛이었다.
다행히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그녀는 곧 경계를 풀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옛 기억을 하나씩 되짚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 그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또래보다 조숙했고, 냉정했지만 웃을 때만큼은 나이에 맞게 환했다.
그때의 그녀는 지팡이보다 책을 더 가까이 두었고, 곧잘 말수가 적어 오해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열면, 그 온도는 누구보다 뜨거웠다.
파티에는 나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정원의 사제, 테사. 엘프답게 조용하고 사려 깊었고, 언제나 유하를 살펴주었다.
테사는 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유하가 밤새 책을 붙잡고 있으면 슬그머니 담요를 덮어주었고, 유하가 화를 낼 때는 조용히 옆에 앉아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용의 혈통을 이은 소녀, 라나. 현실감이 부족할 정도로 평온했지만, 누구보다 다정했다.
라나는 늘 엉뚱한 말을 했다. 전투가 코앞인데도 "저 구름은 솜사탕 같다"는 식으로 딴생각을 하다가, 정작 위기의 순간에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검을 뻗었다.
우리 네 사람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넘어왔다.
늪지대의 괴물들, 얼음산의 마수들, 이름조차 남지 않은 소국의 내전—그 모든 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족 총수와의 결전에서, 나는 죽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려는 순간, 가슴 한복판이 뜨겁게 조여왔다.
창을 든 손. 낯익은 얼굴. 웃음도 아니고 울음도 아닌 표정.
그 손은 분명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떨림이 두려움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누구였지.'
생각이 거기서 다시 막혔다. 마치 무언가가 그 기억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그 얼굴의 윤곽만 남고 나머지는 흐려졌다.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걸까.'
'죽음의 순간이 기억을 왜곡시킨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답을 낼 수 없는 물음이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괜찮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억지로 생각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선유하였다.
그녀는 지금도 책상 앞에 앉아 시든 꽃 한 송이를 새로 집어 들고 있었다.
그 꽃은 색이 다 빠져 누런빛만 남은, 언제 피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꽃잎을 하나씩 뽑으며 무언가를 되뇌었다.
"돌아온다, 안 돌아온다, 돌아온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억양의 굴곡조차 없었다. 마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말이었다.
천 년 동안 매일 이 짓을 반복했다면, 그녀의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책상 위에는 이미 뽑혀 떨어진 꽃잎들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그 더미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이었다.
'저 여자는 대체 몇 번이나 저 말을 되뇌었을까.'
'천 년이라면, 하루에 한 번만 해도 삼십육만 번이 넘는다.'
계산이 끝나자 오히려 아득해졌다. 숫자로 환산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절대 이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다짐이 가슴속에서 불씨처럼 타올랐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약속이 있었다. 유하를 지키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남기던 순간의 목소리, 그때의 표정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약속이 지금 이 형태로라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나를 붙들어 세웠다.
'몸이 없어도 상관없다. 지켜보고, 지킬 수 있는 만큼 지킨다.'
결심이 서자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몸도 없고, 목소리도 낼 수 없고,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존재이지만—그래도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위로였다.
그 순간, 탑 아래에서 다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컸다.
돌과 돌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 그리고 뒤이어 낮게 울리는 진동이 탑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선유하가 벌떡 일어나 지팡이를 잡았다.
그녀의 손끝이 지팡이 끝을 감싸 쥐는 순간, 옅은 빛이 스며 나왔다.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짐승이 아니야."
낮게 내뱉는 목소리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 말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이미 무언가를 감지하고 있었다.
창밖,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탑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형체는 아직 어둠에 가려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걸음걸이만으로도 짐승의 것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일정한 간격, 일정한 속도—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이 탑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