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가문 연무장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검을 맞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채앵.
챙, 채앵.
강신은 목검을 든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등짝으로 흙바닥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하늘이 유난히 높았다.
일어나라, 강신 도련님. 상대 기사가 목검 끝으로 어깨를 찔렀다. 이번엔 삼 초 만이었네요.
강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삼 초면 봐준 거지. 그전엔 일 초도 못 버텼으니까.
웃음소리가 연무장 곳곳에서 터졌다.
젊은 견습 기사 하나가 옆 사람을 툭 치며 낮게 속삭였다.
저래도 공작가 도련님이라니.
그 옆에서 다른 기사가 낄낄거렸다.
검 잡는 폼은 그림 같은데, 몸이 안 따라가시잖아.
공작가 차남이라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강신도 안다.
전생의 기억으로는, 이 몸의 주인이 게임 속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알고 있었다.
순결한 담당 중보스. 淫魔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
검술 재능은 바닥이지만, 그건 표면일 뿐이었다.
애초에 이 몸으로 검술이나 파고들 생각은 없었으니까.
기사가 다시 목검을 겨눴다.
한 번 더 하시겠습니까.
강신은 목검을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일부러 힘을 뺀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연기치고는 그럴듯했다.
그리고 웃었다.
이번엔 좀 다르게 해볼까.
기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다르다니 뭐가 다릅니까, 라고 되묻고 싶은 눈치였다.
강신은 눈을 마주쳤다.
체내 깊은 곳, 늘 억눌러두던 감각의 매듭을 슬쩍 풀었다.
후욱.
공기의 결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주변 공기가 물처럼 무거워졌다가, 다시 가벼워졌다.
기사의 발이 순간 멈췄다.
어, 어라.
동공이 흔들렸다. 목검을 쥔 손끝이 떨렸다.
지금이다.
강신은 낮게 발을 밀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목검을 기사의 옆구리에 붙였다.
딱.
연무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바람에 흙먼지만 낮게 흩날렸다.
이게, 어떻게.
기사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금 뭘 본 거냐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이도 있었다.
강신은 목검을 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운이 좋았어요.
속으로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매혹의 오라를 들키면 곤란하지.
딱 한 순간, 상대의 판단력을 흐트러뜨리는 것.
그게 淫魔의 힘이었다. 검술이 아니라 정신을 흔드는 힘.
들키면 곤란한 것도 아니고, 소문나면 골치 아픈 것도 아니고,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져야 할 힘이었다.
연무장 구석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강도현 공작이었다.
강신의 아버지이자 왕국 근위기사단장.
키가 크고 등이 곧은 사내였다. 얼굴에는 표정이랄 게 거의 없었다.
강도현은 팔짱을 낀 채 아들을 내려다봤다.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운으로 이겼다는 놈이, 저 표정은 뭐냐.
강신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의 눈은 늘 그랬다. 뭔가 꿰뚫어보는 것 같은데, 정작 입은 열지 않는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연무장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가 아니라, 사람 뛰는 소리였다. 급했다.
전령이 뛰어오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얼굴이었다.
공작님. 왕궁에서 급보입니다.
강도현의 눈이 좁아졌다.
무슨 일이냐.
전령은 숨을 몰아쉬며 종이를 내밀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동부 국경 지대에서 몬스터 웨이브 조짐이 관측됐습니다. 이례적인 규모라고 합니다.
연무장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굳었다.
방금까지 웃던 얼굴들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강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표정의 이유는 조금 달랐다.
온다. 진짜로 오는구나.
전생의 기억 속, 게임 '무지갯빛 봄의 길'의 초반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쳤다.
대형 재난. 세계선의 붕괴 전조.
동부에서 시작되는 첫 번째 균열. 게임 속에서는 튜토리얼 뒤에 붙는 이벤트였다.
이게 진짜였다.
소설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고, 지금 강신이 발붙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원작 타임라인대로면 아직 이르다.
그런데 벌써 균열 조짐이라니.
뭔가 어긋났다.
강도현이 종이를 구겨 쥐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면서 종이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기사단 소집한다. 전원 대기 상태로.
연무장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기사들이 각자 무기를 챙기고, 대기실 쪽으로 뛰어갔다.
누군가 갑옷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챙그랑.
강신은 조용히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소란 속에 끼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검술로 도움 줄 몸도 아니고.
예상보다 빠른데.
원작 시나리오라면, 이 시기의 재앙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벌써.
시나리오가 앞당겨졌다는 건, 뭔가가 개입했다는 뜻이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것부터가 그 개입 아닌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등 뒤에서 익숙한 야옹 소리가 들렸다.
검은 그림자가 강신의 발치를 스치듯 다가왔다.
흑묘 한 마리였다.
털이 유난히 검고 매끈했다. 눈동자만 노랗게 빛났다.
설아, 너도 느꼈어?
고양이는 대답 없이 강신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강신은 허리를 굽혀 그 등을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유난히 서늘했다.
평소보다 체온이 낮은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
고양이가 낮게 울었다.
냐옹.
경고처럼 들렸다.
강신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맑았다. 너무 맑아서 오히려 불길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 연무장은 이미 전쟁 준비로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강신은 그 풍경을 잠시 눈에 담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동부에서 시작되는 균열이라면, 그 뒤에 무엇이 따라오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걸 안다고 해서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몸은 여전히 검 한 번 제대로 못 휘두르는 淫魔의 그릇일 뿐이었다.
강신은 흑묘를 품에 안아 올렸다.
설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가 봐.
고양이는 아무 대답 없이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멀리서 기사단의 나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빠앙.
날카롭고 긴 소리였다.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소리치고는, 지나치게 맑은 하늘 아래서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