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정신을 차렸을 때, 강신은 다시 안개 속 훈련장에 서 있었다.
닷새째 밤이었다.
발밑의 흙은 밟을 때마다 축축했다. 안개는 어제보다 조금 더 짙었다.
서은채가 목검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오늘도 시작이야.
강신은 목검을 받아 들었다.
손아귀에 예전보다 익숙한 무게였다.
잡는 순간 손목이 저절로 자세를 잡았다.
지구력 훈련부터.
서은채가 손짓하자 안개 속에서 훈련용 인형 다섯 개가 떠올랐다.
인형들은 얼굴도 없이 목검을 쥐고 있었다.
다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마.
강신은 목검을 고쳐 잡았다.
예전엔 세 번 쓰러지면 그만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서은채는 매번 혀를 찼다.
지금은 다르다.
淫魔 계열의 지구력은 육체가 지치는 속도를 극단적으로 늦췄다.
숨은 가빠도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근육이 타는 느낌은 그대로였는데, 그 타는 느낌이 예전만큼 몸을 붙잡지 않았다.
첫 번째 인형이 쓰러졌다.
채앵.
두 번째, 세 번째.
서은채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자세가 어느새 풀려 있었다.
네 번째 인형이 쓰러지자 강신은 여전히 서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지만 목검을 놓지 않았다.
다섯 번째 인형만 남았다.
강신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다리는 여전히 움직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무렵.
쾅.
마지막 인형이 무너졌다.
강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은 헐떡였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땀이 눈으로 흘러들어와 시야가 흐릿해졌다.
서은채가 다가와 내려다봤다.
표정이 묘했다.
첫 시도에 다섯 개를 다 처리한 애는 처음 봐.
강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구력만 좋으면 뭐해요. 여전히 검은 형편없는데.
방금도 자세가 세 번은 무너졌잖아요.
서은채가 팔짱을 꼈다.
그건 조금씩 고치면 돼. 지구력이 뒷받침되면 반복 훈련의 양이 다르니까.
남들이 열 번 시도할 시간에 넌 백 번을 시도할 수 있다는 거야.
강신은 그 말에 눈을 껌뻑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淫魔의 힘이 약점이 아니라, 검술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는 뜻.
지금까지는 그 힘을 숨기고 죽이는 데만 신경을 썼다.
서은채가 검을 고쳐 잡았다.
이번엔 매혹 오라를 써봐.
연무장에서처럼요?
응. 하지만 이번엔 나한테.
강신은 움찔했다.
괜찮아요? 그거 상대 판단력을 흐리는 거라.
잘못 걸리면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요.
나한테 안 통할 테니까 걱정 마.
서은채의 자신감이 묘하게 얄미웠다.
강신은 오라를 슬며시 풀었다.
후욱.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안개 사이로 옅은 붉은 기운이 잠깐 스몄다가 사라졌다.
서은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안 통하네.
예상보다 강하네. 보통은 이 정도면 살짝 흔들려.
서은채가 검을 휘둘렀다.
강신은 반사적으로 목검을 들어 막았다.
채앵.
손목이 저려왔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가벼웠다.
다시 부딪히고, 밀리고, 다시 버텼다.
몇 번이고 반복됐다.
서은채의 검이 점점 빨라졌다.
강신도 조금씩 그 속도를 따라갔다.
한 번은 완전히 뒤로 밀려 넘어질 뻔했다.
한 번은 어깨를 스치듯 맞았다.
그래도 목검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강신의 목검이 서은채의 검을 비껴 튕겨냈다.
딱.
연습용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서은채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 한 거야.
강신도 스스로 놀란 얼굴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됐어요.
몸이 먼저 움직이고 나서야 머리가 따라온 느낌이었다.
서은채가 검을 주워 들며 웃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지구력으로 반복하고, 매혹으로 순간의 틈을 만들고.
그 조합이 방금 나온 거야.
강신은 그 말을 곱씹었다.
淫魔의 능력이 검술과 완전히 별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배운 검술 이론이 하나로 이어지는 느낌.
서은채가 검을 거두며 강신을 바라봤다.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방금까지의 웃음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뭐예요, 왜 그런 얼굴로 봐요.
서은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목검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릴 뿐이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뭔데요.
너, 3년 뒤에 뭘 하게 될지 알아?
강신의 심장이 덜컥했다.
그건 무슨 뜻이에요.
서은채는 안개 저편을 바라봤다.
표정에 희미한 불안이 스쳤다.
이 힘, 잘못 다루면 3년 안에 널 노리는 것들이 있어.
淫魔의 혈통을 원하는 자들.
강신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게 게임 시나리오에 없던 정보였다.
원작에서는 어떤 식으로.
머릿속으로 원작의 흐름을 되짚어봤지만 3년이라는 시점 자체가 낯설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
서은채가 다시 강신을 돌아봤다.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훈련을 봐주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 뭔가를 아는 사람의 눈이었다.
다음엔 더 자세히 알려줄게. 오늘은 여기까지.
기다려요, 그게 다예요? 누가 노린다는 건데요.
서은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안개 너머를 응시할 뿐이었다.
안개가 서서히 짙어졌다.
강신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발밑의 감각이 먼저 사라지고, 그다음 소리가 멀어졌다.
잠에서 깨기 직전, 서은채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남았다.
다음 훈련까지, 몸을 만들어둬. 진짜 위협이 올 때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
그 목소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강신이 아는 서은채의 목소리치고는 낯설게, 불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