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빛기둥에 손을 대는 순간, 강신의 눈앞에 문구가 떠올랐다.
[적성 판정을 시작합니다.]
강신은 긴장한 채 결과를 기다렸다.
위잉.
빛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묘하게 낯선 감각이었다.
피부 아래로 뭔가가 스며드는 느낌.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익숙했다.
잠시 후, 새로운 대괄호가 떠올랐다.
[검술 적성: 낮음]
[마법 적성: 낮음]
[淫魔 계열 적성: 극도로 높음]
강신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이거.
한 번 더 확인해봐도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낮음, 낮음, 극도로 높음.
세 줄이 나란히 놓인 걸 보니 헛웃음부터 나왔다.
서은채가 팔짱을 낀 채 결과를 읽었다.
표정이 순식간에 미묘해졌다.
이건 처음 보는 유형인데.
강신은 헛웃음을 흘렸다.
淫魔 계열이라니, 그게 훈련장에서 무슨 쓸모가 있어요.
검술도 마법도 안 되면, 뭘로 살아남으라는 건지.
칼도 못 쓰고 마법도 못 쓰는 놈이 검술 훈련장에 서 있는 것부터가 웃긴 그림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淫魔의 피가 몸에 흐른다는 사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확인되니 다른 느낌이었다.
숫자로, 글자로, 대괄호 안에 못 박히니까 무게가 달랐다.
게임 시나리오에서 정해진 흐름 그대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뜻인가.
강신은 목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서은채가 종이 같은 걸 손에 쥐고 훑어봤다.
淫魔 계열은 세 가지 하위 능력으로 나뉘어.
지구력, 매혹, 사역마 계약.
하나씩 다 극도로 높다고 나오네.
서은채가 종이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가락으로 항목을 하나씩 짚었다.
셋 다 극도로 높은 건 흔치 않아.
보통은 하나 정도 튀고 나머지는 평범한 수준인데.
강신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검술 훈련장에서 도움이 돼요?
직접적으로는 별로.
서은채가 솔직하게 말했다.
검을 잘 휘두르게 해주는 능력은 아니니까.
하지만 조합하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어.
강신은 그 말에 귀를 세웠다.
조합이요?
네 지구력이면 어떤 상황에서도 안 죽어. 매혹이면 상대의 판단을 흐릴 수 있고. 사역마 계약이면.
서은채가 말을 멈췄다.
말을 멈춘 채로 강신의 발밑을 내려다봤다.
시선이 향한 곳을 강신도 따라 봤다.
그때, 강신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르륵 올라왔다.
야옹.
설이었다.
이 세계까지 따라왔어?
강신은 놀란 눈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훈련장 바닥에는 아무 틈도 없었는데, 그림자가 마치 바닥을 뚫고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서은채의 눈이 커졌다.
계약된 사역마구나.
계약이요?
네가 이 녀석과 이미 계약이 되어 있어. 그것도 아주 강한 유형으로.
강신은 설이를 안아 들었다.
작고 가벼운 몸이었다. 익숙한 무게였다.
품에 안기는 순간 낮은 골골 소리가 진동처럼 손끝에 전해졌다.
너, 이런 거였구나.
설이는 대답 없이 골골 소리를 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마치 다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서은채가 흥미로운 눈으로 둘을 바라봤다.
사역마 적성이 이렇게 높으면, 저 고양이도 언젠가 변할 수 있어.
변한다니, 뭐로요.
인간 형태로. 계약자의 힘이 강해질수록.
강신은 잠시 말을 잃었다.
고양이가 인간이 된다는 말을 이렇게 태연하게 들을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강신은 설이를 내려다봤다.
작은 눈이 마주 올려다봤다.
너도 그걸 바라는 거야?
설이는 눈을 깜빡였다. 대답이라기보다는 반응이었다.
강신은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말은 못 해도 눈치는 있는 놈이었으니까.
서은채가 다시 종이를 접었다.
淫魔 계열이라고 절망할 필요 없어. 이 조합, 생각보다 특이하니까.
특이한 게 좋은 뜻이에요?
적어도 흔하지 않다는 뜻이지.
세상에 이런 조합으로 태어난 놈이 몇이나 될까.
강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술 대신 매혹과 지구력이라니.
아버지한테 이걸 어떻게 설명해.
가문 대대로 검술 명가라고 자랑하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에 이 결과를 들이밀 자신은 없었다.
연무장에서 오라를 쓴 것도 淫魔 힘이었으니, 결국 그것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이건 확실한 거니까.
숨어서 쓰는 게 아니라 정면으로 키울 수 있는 힘이라는 것.
강신은 목검을 다시 고쳐 쥐었다.
좋아요. 그럼 이걸로 어떻게 살아남는지 가르쳐줘요.
서은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 말 기다렸어.
검을 못 써도 상관없어.
네 방식대로 강해지면 되는 거야.
강신은 그 말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이 사람은 검술 실력만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훈련장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듣는 말이었다.
너는 이 조합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은채가 갑자기 검을 고쳐 잡으며 강신을 바라봤다.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공기가 한 톤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하나 확인해야 할 게 있어.
뭔데요.
淫魔 계열이 극도로 높다는 건, 반대로 폭주 위험도 크다는 뜻이야.
강신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폭주요?
힘이 감당을 넘어서면, 통제를 잃는 유형이야.
서은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한 번 통제를 잃으면 스스로도 못 멈춰.
그 앞에 선 사람이 계약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강신은 품에 안은 설이를 무의식적으로 더 꽉 끌어안았다.
작은 몸이 조금 움찔했지만 도망가진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더 자세히 알아보자.
서은채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넣었다.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표정을 보니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강신은 그 말을 곱씹으며 안개 너머를 바라봤다.
폭주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또 하나의 그림자가 저편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윤곽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낯선 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