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입학식 저녁, 나는 기숙사 방에 홀로 앉아 총대 연설문을 다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A4 용지 다섯 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각 장마다 빨간 펜으로 그은 줄이 서너 개씩 나 있었다.
연설문은 이미 열두 번째 수정 중이었다.
"청화의 미래를 짊어질 우리들은..."
소리 내어 읽어보았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짊어질'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 부분을 지우고 '함께 만들어갈'이라고 고쳐 썼다.
다시 읽어보니 이번에는 문장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책상 스탠드 불빛 아래로 내 손등의 잉크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나는 펜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연설문의 문장들이 계속 뒤섞여 돌아다녔다.
내일 아침 전체 조회에서 이 연설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명치 끝이 조여왔다.
두 시간쯤 뒤척이던 나는 결국 창문을 열고 밤바람을 쐬기로 했다.
창밖으로 손을 뻗으니 4월 밤공기가 서늘하게 손끝을 스쳤다.
기숙사 뒤편 정원은 이 시간이면 늘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잠옷 위에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복도에는 인기척이 없었고, 형광등만 일정한 간격으로 웅웅거리고 있었다.
나는 슬리퍼를 신은 채 살금살금 정원으로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서 몇 번이나 멈춰 섰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유리문을 밀자 서늘한 흙냄새가 밀려들었다.
달빛이 잔디밭 위로 길게 늘어졌고, 나는 그 위를 천천히 걸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슬리퍼 사이로 스며들어 발가락이 시렸다.
정원 한쪽에 심어진 벚나무는 아직 꽃봉오리를 채 터뜨리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그 나무 아래를 지나며 괜히 나뭇가지를 한 번 만져보았다.
그런데 정원 한복판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웅크려 있었다.
강주혁이었다.
교복 재킷을 벗어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채였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백묵 같기도 하고 분필 같기도 한 하얀 막대였다.
"거기서 뭐 해요?"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물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는 뒤를 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는 나를 돌아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얼굴로 씩 웃었다.
"아, 서린. 마침 잘 왔다."
그가 밝게 웃었다.
나는 그의 앞에 그려진 것을 보려고 조금 더 다가섰다.
바닥에는 낯선 문자들이 원을 그리며 새겨져 있었다.
지름이 어림잡아도 2미터는 넘어 보였다.
원 안쪽에는 처음 보는 기호들이 촘촘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나는 그 문양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며 물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팔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 선조가 남긴 소환진이야. 초대 용사님이 쓰던 거."
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마치 숙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태연했다.
"소환진이라니요, 뭘 부르려고요?"
나는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발뒤꿈치가 축축한 잔디에 미끄러질 뻔했다.
"너가 낮에 그랬잖아. 뭐든 진심으로 해주면 좋겠다고."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
나는 그제야 낮의 대화를 떠올렸다.
점심시간, 식당에서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다.
총대로서 부탁이 있으면 진심으로 들어달라는 뜻이었을 뿐인데, 그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내가 진심으로 보여줄게. 우리 가문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그의 눈빛에는 자랑스러움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꼈다.
"잠깐, 하지 마세요!"
나는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그가 손바닥을 원의 중심에 대는 순간, 바닥의 문양이 새하얀 빛으로 타올랐다.
"이건... 안 돼요!"
나는 뒤로 넘어졌다.
엉덩이가 축축한 흙바닥에 그대로 부딪혔다.
빛이 하늘 높이 솟구쳤고, 정원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힐 듯 흔들렸다.
벚나무 가지가 채찍처럼 휘어지며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들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쾅!
땅이 크게 흔들렸고,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빛의 기둥이 어찌나 강렬한지 눈을 제대로 뜨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실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빛이 사그라들자, 그 자리에는 거대한 형체가 서 있었다.
비늘로 뒤덮인 몸통, 밤하늘보다 짙은 검은 눈동자, 날개를 펼치면 정원 전체를 뒤덮을 크기.
용이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초대 용사가 마왕을 격퇴할 때 함께했다는 그 용이었다.
역사 수업에서 그림으로만 봤던 존재가 눈앞에 실체로 서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용의 발톱 하나가 내 팔뚝보다 굵어 보였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와 주변 공기가 일렁였다.
"강주혁, 이게 뭐예요!"
나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목소리가 내 귀에도 낯설게 떨려서 들렸다.
"내가 말했잖아. 진심으로 보여준다고."
그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대단한 선물이라도 준 것처럼 당당한 표정이었다.
용의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한 채, 심장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용의 눈동자 속에서 내 작은 형체가 흔들리며 비쳤다.
이 소란을 누군가 봤다면, 내일 아침 학원 전체가 이 광경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는 정원에 함께 서 있던 내가 있었다.
멀리서 기숙사 창문 몇 개에 불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이 소란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이 상황이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는지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