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앙 용사와 무능 공주

5화

이틀 뒤, 학원 게시판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굵은 먹으로 눌러 쓴 글씨가 게시판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었다. "왕위를 노리는 무능한 공주" 글씨 밑에는 누군가 그려 넣은 조악한 그림도 있었다. 왕관을 쓴 채 넘어져 있는 여자아이의 그림이었다. 나는 그 앞을 지나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주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거 진짜 공주님 얘기래." "용을 학원에 풀어놓고 자기가 처리한 척했다던데." 수군거림은 내가 지나간 뒤에도 등 뒤에서 계속됐다.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복도 끝까지 걸었다. 소문은 이미 학원 담장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왕궁에서도 사람이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시녀 하나는 왕궁 관리들이 학원장을 직접 만나고 갔다고 귀띔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공주님, 왕비 전하께서 서한을 보내셨습니다." 시녀가 붉은 인장이 찍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손을 떨며 봉투를 받았다. 인장은 어머니가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쓰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번 편지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봉투를 여는 손끝이 자꾸 미끄러졌다. 안에는 짧은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 해명할 준비를 해두거라." 어머니의 필체는 평소보다 더 딱딱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자로 잰 듯 곧고 날카로웠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쯤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편지를 접어 서랍 깊숙이 넣었다. 서랍을 닫으면서도 손이 떨리는 걸 멈추지 못했다. '해명, 무슨 해명을 하라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속으로 그렇게 되뇌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날 오후, 나는 총대 연설문을 다시 붙잡았다. 책상 위에는 초 열 자루 분량은 될 종이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고쳐 쓰고 지운 자리마다 잉크가 얼룩져 있었다. 연설은 내일이었다. 연설장에서 나는 이 소문을 조금이라도 잠재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 앞에서, 그리고 학원 전체 앞에서 완전히 무너질 게 뻔했다. 나는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 내려갔다.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손끝으로 종이 끝을 문질렀다. 연습실에 앉아 원고를 읽고 있는데,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린, 나야." 강주혁이었다.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문 너머로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잠깐 얘기하자, 나 좋은 생각 있어." 그가 문틈으로 말했다. "됐어요, 이제 그만해요." 나는 지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이 잠겨 있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연설장에서 다 밝힐게. 용은 내가 부른 거고, 서린은 잘못 없다고!" 그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문 너머로도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연설장에서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나는 문을 벌컥 열고 그를 붙잡았다. 그의 옷깃이 손끝에 잡혔다. "왜 안 돼! 진실을 말하면 되잖아!" 그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의 두 눈에는 억울함과 조급함이 뒤섞여 있었다. "당신이 나서면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가 짜고 벌인 일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나는 그의 팔을 붙잡은 채 말했다. "우리가 미리 입을 맞췄다고, 그렇게 몰아갈 거예요." 나는 덧붙였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솔직히 나도 답을 몰랐다. 머릿속으로 온갖 방법을 떠올려 봤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연설문을 고쳐 쓴다고 해서 소문이 사라질 리 없었다. 강주혁이 나서서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 줄 리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일단 내일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제발." 나는 겨우 그렇게 말했다. "...알겠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무언가를 벼르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려 한동안 문 앞에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몸을 돌려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제발 아무 짓도 하지 마.' '내일까지만 참아 줘.'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연설문을 몇 번이고 다시 읽다가 촛불이 다 꺼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연설장으로 향하는 길에 나는 마지막으로 정원을 지나쳤다. 이른 아침이라 정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용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땅바닥에는 큰 발톱이 긁고 지나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어디 갔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경비병 하나가 다급히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의 갑옷이 뛸 때마다 철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공주님! 용이... 용이 사라졌습니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뭐라고요?"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요? 누가 마지막으로 봤죠?" 나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물었다. "새벽 순찰 때까지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경비병이 숨을 헐떡이며 답했다. 연설까지 남은 시간은 삼십 분이었다. 나는 손목에 찬 작은 회중시계를 내려다봤다. 시계 초침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사라진 용이 지금 이 순간, 학원 어디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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