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앙 용사와 무능 공주

4화

그날 오후, 시녀 하나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공주님, 파벌 회의실로 오시라는 전언입니다."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벌써 소문이 다 퍼진 건가.' 나는 옷매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교복 위에 걸친 예복의 단추를 하나씩 채우는 손끝이 자꾸 헛돌았다. 거울 속 내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마주치는 학생들의 시선이 유독 따갑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대놓고 수군거렸고, 누군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용이 소환됐다는 게 이렇게 퍼질 일인가.' 회의실 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문을 열자, 긴 원목 탁자 위로 여섯 개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설화 백작부인이 상석에 앉아 있었고, 그녀를 중심으로 나를 지지하던 귀족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탁자 위에는 두꺼운 서류 뭉치와 찻잔이 놓여 있었지만, 아무도 그 찻잔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식어버린 차의 표면에 얇은 막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유난히 딱딱하게 느껴졌다. "서린 공주님, 우선 상황을 정리해봅시다." 부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용을 소환한 학생은 초대 용사의 직계 후손, 강주혁이라는 신입생입니다." 한 귀족이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 서류에는 강주혁의 가문에 대한 정보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 가문은 대대로 왕가에 빚을 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귀족이 덧붙였다. "소환진의 마력 파장을 조사한 결과, 순수한 의지로 발현된 소환이라는 게 확인됐습니다." 또 다른 귀족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강제로 발현된 게 아니라, 그 학생 스스로 강하게 원해서 발현시켰다는 거죠." 부인이 서류를 손끝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공주님과 함께 있었냐는 게 문제입니다." 부인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나를 꼼꼼히 훑고 있었다. 마치 내 대답 하나하나를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낮에 그 애가 저한테 친구 하자고 했어요." 나는 손을 꼭 쥐며 대답했다. "저는 그냥 예의상 그러자고 했을 뿐이에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거짓말은 아니야.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야.'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 말을 그 학생이 소환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거군요." 부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손가락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그 소리가 회의실의 정적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공주님의 진심이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인이 다시 말했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예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쾅! 문이 벽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저 여기 있습니다!" 강주혁이었다. 경비병 두 명이 그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는 힘으로 그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교복 소매가 찢어져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강주혁,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에 긁히는 소리를 냈다.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서린은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회의실 벽에 부딪혔다. "저는 그냥, 서린이 진심으로 원한다고 해서..."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조용히 하세요!" 부인이 탁자를 짝! 하고 내리쳤다. 회의실 전체가 순간 얼어붙었다. 찻잔이 살짝 흔들려 잔받침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 학생이 지금 여기서 무엇을 증명하려는 겁니까." 부인이 낮게 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강주혁을 향해 서늘하게 꽂혔다. "서린의 진심을 지켜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강주혁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는 조금의 위축도 없이 부인의 시선을 마주 받았다. '저 애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는 거야.'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공주가 저 학생에게 소환을 부탁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한 귀족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회의실 안을 빠르게 퍼져나갔다. 옆에 앉은 다른 귀족도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뭐라 말을 덧붙였다. "아니에요, 그건..." 나는 다급히 반박했지만, 목소리가 회의실 소음에 묻혔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이미 퍼져나가는 웅성거림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내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그 생각이 들자 손끝이 더 심하게 떨렸다. "강주혁 학생은 즉시 퇴장시키세요." 부인이 경비병들에게 명령했다. 경비병들이 다시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그는 끌려 나가면서도 계속 나를 향해 외쳤다. "내가 다 책임질게, 서린! 걱정 마!" 그의 목소리가 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어졌다. 그 말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걸, 그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문이 닫힌 뒤, 회의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 남았다. 부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서린, 오늘부로 총대 연설 준비를 다시 검토해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부인, 저는 정말..." 나는 뭔가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 "압니다." 부인이 조용히 내 말을 끊었다. "하지만 진실보다 소문이 더 빨리 퍼지는 법이에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에는 실망도, 분노도 아닌 어떤 피로함이 서려 있었다. 귀족들도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누군가는 나가면서 나를 흘겨봤고, 누군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의자 밀리는 소리와 발소리가 차례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나는 텅 빈 회의실에 혼자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손끝이 떨리는 걸 느끼며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식어버린 찻잔을 손으로 감쌌지만, 이미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뒤엉켰다. 총대 연설, 파벌의 지지, 소문.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으로, 여전히 정원에 웅크린 용의 그림자가 보였다. 거대한 날개를 접은 채 웅크리고 있는 그 형체는, 마치 이 성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의혹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그 그림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저것 때문에 모든 게 이렇게 됐어.' 그리고 동시에, 저 용을 불러낸 강주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끝까지 당당했다. 마치 자신이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믿는 것처럼. 그 확신에 찬 표정이, 나에게는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저 애가 다음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겠어.' 나는 창문에 손을 짚은 채, 정원의 그림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지켜보았다. 용의 눈이 순간 이쪽을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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