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새벽을 걷는 주먹

1화

새벽 산길엔 안개가 짙었다. 그 안개 사이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달리고 있었다. 숨소리는 거칠었으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는 그 뒷모습은, 누가 보아도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그 소년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다. 먼발치, 늙은 소나무 가지 위였다. 백발이 새벽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소녀였다. 발은 맨발이었고, 서리가 앉은 나뭇가지 위에서도 조금도 떨지 않았다. 소녀의 눈은 오직 그 소년의 등만을 좇고 있었다. '저 아이는, 언젠가······'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안개가 두 그림자를 삼키듯 흘렀고, 산 아래 마을에서 첫 닭 울음이 들려왔다. 소녀는 그대로 사라졌다. 소년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그날의 재회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 이도훈은 오늘도 새벽 산길을 뛰었다. 십 년째였다.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한 이 새벽 달리기는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프나 성하나, 그는 산길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는 무겁게 늘어졌다. 그럼에도 발끝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능선이다.' 발끝에 걸리는 돌부리마다 몸이 휘청였다. 하지만 그 휘청임조차 익숙했다. 십 년을 걸으며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무릎이 깨진 자리엔 흉터가 남았다. 그 흉터들이 지금의 균형감각을 만들었다는 걸 도훈은 알고 있었다. 능선에 다다르자 도훈은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짚었다.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흙바닥을 적셨다.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하지만 몸은 웬만한 어른보다 단단했다. 팔뚝에는 잔근육이 붙어 있었고, 다리는 굽은 대나무처럼 탄력이 있었다. 십 년간의 뛰기가 만들어낸 몸이었다. 하지만 그 몸속엔, 내공이라는 것이 한 톨도 흐르지 않았다. 천생 절맥. 의원들이 그의 몸을 살피고 내린 진단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기혈의 경로가 뒤틀려, 내공을 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체질. 백약이 무효했고, 어떤 명의도 고칠 수 없다 했다. 일곱 살 때였던가. 유명하다는 의원이 저택까지 왕진을 와서 도훈의 손목을 잡고 오랫동안 침묵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 의원은 결국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아이의 기혈은, 마치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체질이지요. 다만……" 말을 흐렸던 그 의원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다만, 이라는 말 뒤에 이어지지 않은 문장. 도훈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직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 의원은 그날 이후 다시 저택을 찾지 않았다.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아이. 무가(武家)에서 그것은 곧 쓸모없는 존재라는 선고와 같았다. 도훈은 허리를 펴고 다시 발을 내디뎠다. 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경사가 눈앞에 있었다. '내공이 없다고, 몸을 단련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것이 도훈이 열 살 무렵 스스로에게 내린 결론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면, 그저 육신을 극한까지 단련하는 수밖에. 남들이 내공으로 강해질 시간에, 그는 근육과 폐활량과 균형감각으로 그 격차를 조금이라도 메우려 했다. 처음엔 하루에 반 리도 채 뛰지 못했다. 산 초입에서 헐떡이며 주저앉아 울었던 날도 있었다. 그때 도훈을 일으킨 것은 아무도 아니었다. 스스로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는 같은 자리에서 넘어졌고, 같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권법도 마찬가지였다. 형 이서준에게서 배운 초식들을 홀로 산속에서 수백, 수천 번씩 반복했다. 내공을 담지 못한 권법은 그저 흉내에 불과했다. 그러나 흉내라도, 도훈은 멈추지 않았다. 정상에 다다르자 그는 자세를 잡았다. 두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두 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했다. '첫째 초식, 파랑권(波浪拳).' 주먹이 뻗어 나갔다. '퍽!'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산자락에 울렸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초식이 이어졌다. 땀이 비처럼 흘렀지만 그는 자세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내공이 실리지 않은 주먹이었다. 그러나 그 속도와 정확도는, 어지간한 삼류 무인의 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넷째 초식, 다섯째 초식. 도훈의 호흡은 초식이 바뀔 때마다 규칙적으로 끊겼다가 이어졌다. 내공이 없는 몸으로 호흡을 다스리는 법을, 그는 스스로 만들어냈다. 들이쉬고 내뻗고, 내쉬고 거둬들이고. 그 리듬은 이제 몸에 새겨진 듯 자연스러웠다. 마지막 초식을 마치고 도훈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오늘도 이만큼 했다.' 작은 성취감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성취감이었다. 그러나 도훈에게는 그것만으로도 하루를 버틸 이유가 되었다. 멀리 산 아래로 마을의 지붕들이 안개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도훈은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내려갈 시간이었다. *** 산에서 내려와 집에 도착했을 때, 저택은 이미 분주했다. 이가(李家)의 저택은 상인 가문답게 넓고 화려했다. 곳곳에 창고가 있었고, 하인들이 부지런히 짐을 나르고 있었다. 아버지 이현성이 일으킨 상단은 인근 세 개 현에 걸쳐 물류를 장악하고 있었다. 대문을 지나 안뜰로 들어서니, 짐수레가 줄을 지어 서 있었고 일꾼들이 소리를 주고받으며 곡물 자루를 나르고 있었다. 도훈은 그 사이를 지나며 몇몇 하인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도훈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지만, 그 눈빛엔 늘 미묘한 동정이 섞여 있었다. 도훈은 그것에 익숙했다. 익숙하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도훈이 마당을 지날 때, 둘째 형 이서준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또 산에 갔다 왔냐?" 서준은 열여덟 살로, 이가의 자랑거리였다. 최근 내공 칠 층에 도달한 재목이었다. 무가에서 열여덟에 칠 층이면, 십 년 안에 팔 층은 물론 그 이상까지도 노릴 수 있는 재능이라 했다. 도훈은 땀에 젖은 옷자락을 대충 털어내며 대답했다. "응. 형은 오늘도 수련이야?" "당연하지. 그런데 너······" 서준이 도훈의 팔뚝을 슬쩍 만져보았다. 단단한 근육이 손끝에 잡혔다. "이야, 이거 봐라. 근육이 또 붙었네." "형이 알려준 초식 덕분이지." 서준은 웃으며 도훈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였다. "내공이 없어도 이렇게까지 하는 놈은 처음 봤다. 진짜." 그 말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 어린 감탄이었다. 서준은 동생의 남모를 노력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매일 새벽, 동생이 몰래 방을 빠져나가 산으로 향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아버지에게 고하지 않았다. '내공 한 톨도 없는 놈이 저렇게까지 몸을 굴리다니.' 서준은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도훈에게 내공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지금의 노력으로 어디까지 갔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서준은 씁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서준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 다시 도훈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가 언제 그만둘까 궁금했다. 사람이 아무리 독해도, 결과가 안 보이면 지치는 법이거든." "그래서? 결론은?" "아직도 안 그만뒀잖아." 서준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 안에는 형으로서의 미안함과, 동생에 대한 존중이 뒤섞여 있었다. "밥 먹었어?" "아니, 지금 씻고 먹으려고." "빨리 씻어. 아버지가 오늘 오전에 상단 일 가르쳐주신다고 하셨어." 도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상단 일. 장부 정리, 물류 계산, 거래 협상. 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치는 것들이었다.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아들에게 남은 유일한 길, 가업의 승계. 도훈은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착실히 배우고 있었다. 숫자를 다루는 일에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고, 도훈은 그 안에서 다른 종류의 성취감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엔 늘 작은 균열이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무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대답 없는 질문이었다. 도훈은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밀어냈다. 지금은 씻고, 밥을 먹고, 아버지의 가르침을 들을 시간이었다. 씻고 나온 도훈은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식당으로 향했다. 밥상 위엔 늘 그렇듯 소박한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상단으로 큰돈을 만지는 가문이었지만, 이현성은 밥상만큼은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도훈은 그것이 아버지의 성정을 닮은 것이라 생각했다. *** 그날 오후, 저택으로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씨세가(朴氏世家)의 가주, 박도협이었다. 인근에서 손꼽히는 무가의 수장이 직접 이가의 저택을 방문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손님맞이 준비를 서둘렀다. 대청엔 새 방석이 깔렸고, 부엌에선 귀한 찻잎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도훈은 마당 한쪽에서 그 소란을 지켜보았다. '박씨세가에서 왜 갑자기······' 상인 가문과 무가의 만남은 흔했지만, 가주가 직접 발걸음을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대개는 대리인이나 사자를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박도협이 직접 왔다는 건, 그만큼 이가에 특별한 용건이 있다는 뜻이었다. 서준이 다가와 도훈의 어깨를 툭 쳤다. "박 가주님이 내 실력 좀 보고 싶다고 하셨대." "형을?" "칠 층 도달했다는 소문이 퍼졌나 봐. 이런 자리는 원래 잘 안 오시는데." 서준의 목소리엔 옅은 긴장이 섞여 있었다. 그가 손끝으로 옷깃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도훈은 놓치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런 자리에서도 여유롭게 웃던 형이었다. 박도협은 팔 층 내공의 강자였다. 인근에서 그와 견줄 만한 무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세 개 현을 넘어서까지 퍼져 있었고, 몇 년 전 산적 떼를 단신으로 정리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도훈은 저 멀리 대문으로 들어서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중년의 사내가 선두에 서 있었다. 체구는 크지 않았으나, 걸음걸이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눈빛은 날카로웠고, 걸음마다 발밑의 흙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저 사람이 박도협인가.' 기척이 소란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했다. 그런데도 그 조용함이 마당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도훈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박도협의 뒤로는 수행하는 무사 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 역시 평범한 하인들과는 다른 걸음새를 지녔다. 발끝이 땅에 닿는 소리조차 거의 나지 않았다. 도훈은 그 무사들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다른 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지 실감했다. 박도협의 시선이 잠깐 마당을 훑었다. 그리고 그 시선이, 아주 짧게 도훈에게 머물렀다. 무심한 눈빛이었다.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듯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시선. 하지만 도훈은 그 짧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이렇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압박감이었다.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듯한, 미묘한 위압. 발밑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바람이 유독 세게 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도훈의 심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박도협의 시선은 이내 서준에게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자네가 이서준인가. 칠 층에 도달했다고?" 서준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박 가주님을 뵙습니다." "실력을 좀 보고 싶은데, 시간이 되는가?" 서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훈은 형의 뒷모습에서 미세한 떨림을 읽었다. 늘 자신만만하던 형의 어깨가, 지금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마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하인들도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저택 안쪽에서 나오던 이현성의 발걸음마저 잠시 멈췄다. 도훈은 그 침묵 속에서, 박도협의 시선이 다시 한번 자신을 향할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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