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박씨세가의 방문은 짧은 소란으로 끝났지만, 그날 박도협이 던진 말은 이가 저택 곳곳에 조용히 퍼졌다. 하인들 사이에서도, 상단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절맥은 무의미하다'는 인식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었으나, 팔 층 강자의 입으로 재확인된 그 말은 새삼스러운 무게를 지녔다.
부엌 아낙들은 도훈이 지나갈 때마다 목소리를 낮췄다. 낮췄지만, 그 낮춘 목소리가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그 팔 층 무인이 그러셨대. 셋째 도련님 무공은 그냥 흉내라고."
"쉿, 들으시겠다."
들었다. 이미 다 들었다. 도훈은 그런 말들을 흘려듣는 법을 오래전부터 익혀왔다. 표정을 바꾸지 않는 것.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대응법이었다.
도훈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지냈다. 새벽 수련도 거르지 않았고, 낮에는 여전히 상단 일을 배웠다.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같았다. 동트기 전, 저택 뒤편 공터에서 몸을 풀고, 아침을 먹은 뒤엔 상단 전각으로 향해 장부와 씨름했다. 셋째 도련님이 무인이 아니라 상인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가에서는 이미 정해진 수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이 장부에서 이상한 점 안 보이니?"
이현성이 장부 한 권을 도훈 앞에 내밀었다. 도훈은 종이를 넘기며 숫자들을 훑었다.
손끝이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숫자와 숫자 사이, 아주 미세한 어긋남.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갔을 자리였다.
"여기, 이 항목이 지난달보다 이상하게 낮습니다. 창고 재고와 안 맞는 것 같은데요."
이현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장부를 도훈의 손에서 가져가 직접 그 항목을 짚어보았다. 손가락이 숫자를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맞다. 이거 정확히 봤구나."
아버지의 목소리엔 작은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도훈은 그 순간, 아주 잠깐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것에서라도,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 밝음은 작았지만 분명했다. 가슴 한쪽이 데워지는 느낌. 도훈은 그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 밝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 이런 감각이 있으니 상단을 물려받는 데 문제없을 거다."
이현성은 흡족한 얼굴로 말했지만, 그 말은 도훈에게 다른 의미로 들렸다.
무공을 익히지 못하니, 상인의 길이나 잘 걸어라.
아버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훈의 마음은 이미 박도협의 말로 인해 예민해진 상태였다. 모든 격려가, 어딘가 위로처럼 느껴졌다.
이현성은 다시 장부에 시선을 돌렸다. 도훈은 그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사랑과 기대는 다른 것이었다. 아버지가 도훈에게 거는 기대는, 형들에게 거는 기대와는 이미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 있었다.
"창고 관리인을 불러야겠구나. 도훈이 네가 직접 물어보겠느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도훈은 대답하며 장부를 다시 펼쳤다. 숫자들이 눈앞에서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
그날 저녁, 저택에 전서가 도착했다.
큰형 이태강의 소식이었다.
전서를 든 하인의 발걸음이 유독 빨랐다. 저택 앞마당을 가로질러 본채로 뛰어드는 그 모습에, 마당을 지나던 사람들이 저마다 걸음을 멈추고 눈으로 뒤를 쫓았다.
이태강은 열여덟 살에 이미 칠 층 내공으로 천원문(天元門)에 정식 제자로 입문한, 이가의 최고 자랑거리였다. 천원문은 인근에서 손꼽히는 대문파로, 그곳의 정식 제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명예였다.
입문한 지 이 년이 지났으나, 태강은 한 번도 귀가하지 않았다. 문파 내에서의 수련이 그만큼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도훈은 큰형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 년이나 지난 기억은 이미 흐릿했다. 다만 떠나기 전날 밤, 형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했던 말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도훈아, 형이 없어도 잘 지내야 한다. 형이 강해지면, 널 지켜줄 힘도 커지는 거니까."
그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뻐근해졌다.
전서를 읽은 이현성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종이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태강이가 팔 층에 근접했다는구나! 천원문 내에서도 손꼽히는 성취라고 한다!"
저택 전체가 잠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인들도 저마다 웅성거리며 기뻐했다. 부엌에서는 벌써 술상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고, 마당의 개들조차 그 들뜬 기운을 눈치챈 듯 짖어댔다.
서준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형이 진짜······ 대단하네."
서준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마치 그 말을 반복함으로써 형의 성취를 자신의 것으로 조금이나마 나누어 가지려는 것처럼.
도훈도 함께 축하의 말을 건넸다. 진심이었다. 큰형은 어릴 때부터 도훈을 아껴준 사람이었고, 그의 성취는 진심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큰형님이 팔 층이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그 기쁜 소식 뒤에, 도훈의 마음 한구석엔 씁쓸한 그늘이 내려앉았다.
'큰형은 벌써 팔 층 근처. 서준 형은 칠 층. 나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격차였다. 형들은 문파의 이름 아래 정식 제자로 인정받고, 계속해서 벽을 넘어서고 있었다. 도훈은 그저 산길을 뛰고, 주먹을 뻗을 뿐이었다.
숫자로 셈해보면 더 선명해지는 격차였다. 태강은 팔 층 근접, 서준은 칠 층. 도훈은 내공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층수로 따지자면 영(零)이었다. 시작점조차 없는 것이다.
식사 자리에서 이현성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우리 이가에서 이렇게 훌륭한 아들들이 나오다니, 내 평생 이보다 자랑스러운 일이 없다!"
술잔이 부딪는 소리가 울렸다. 서준도, 다른 가족들도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식탁 위엔 평소보다 화려한 음식들이 올라와 있었다. 큰형의 성취를 축하하기 위해 급히 마련된 자리였다. 하인들이 연신 술과 요리를 날랐고,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도훈도 잔을 들었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서, 그는 자신이 이 축배 속에서 조용히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옆자리에 앉은 서준이 도훈의 어깨를 툭 쳤다.
"너도 언젠가는 형처럼 될 거야. 걱정 마."
위로였다. 그러나 위로라는 것을 알기에, 도훈은 그 말이 더 아팠다. 언젠가는, 이라는 말 속에 담긴 불확실함. 서준 자신도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도훈이도 열심히 상단 일 배우고 있으니, 나중에 우리 상단을 물려받아 든든히 받쳐줄 거다."
이현성이 뒤늦게 덧붙인 말이었다. 형들의 성취에 비하면 초라한 몫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웃으며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대답이 진심인지, 그저 이 자리를 넘기기 위한 말인지, 도훈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이현성은 다시 한번 전서를 꺼내 읽었다. 그의 눈가가 젖어 있었다. 자랑스러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도훈은 그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볼 때는, 저런 눈빛을 짓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원망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었다.
***
밤이 깊어지자 도훈은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낮에 억눌러둔 것들이 밤이 되자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무게로 쌓였다. 그는 저택 뒤편 작은 공터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며 도훈은 몇 번이고 걸음을 멈췄다. 형들의 방이 있던 자리를 지날 때마다, 텅 빈 방문이 유독 크게 느껴졌다. 태강의 방은 이 년째 비어 있었고, 서준은 아직 저택에 머물렀지만 곧 문파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결국 이 집에 오래 남을 사람은 자신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달빛이 공터를 비추고 있었다.
도훈은 자세를 잡았다.
'파랑권. 첫째 초식.'
주먹이 뻗었다. '퍽!'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 유독 크게 울렸다.
'둘째 초식.'
다시 주먹이 뻗었다. 발끝에서 힘이 올라와 팔뚝을 지나 주먹 끝에 모이는 감각. 도훈은 그 감각을 십 년째 반복해오고 있었다.
셋째 초식. 넷째 초식. 동작이 이어질수록 숨이 거칠어졌다. 몸은 땀으로 젖어갔고, 옷자락이 등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도훈은 멈추지 않았다.
박도협의 말이 귓가에 되풀이됐다.
'흉내일 뿐이야.'
도훈은 이를 악물고 다시 주먹을 뻗었다.
'흉내라도, 계속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 물음에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오직 밤바람과 달빛만이 공터를 채우고 있었다.
도훈은 문득 걸음을 늦추고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굳게 박인 굳은살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났다. 십 년간 쌓아온 굳은살이었다. 그러나 그 굳은살이 아무리 단단해져도, 팔 층 무인의 눈에는 그저 헛수고로 보였을 것이다.
'내공이 있었다면, 이 굳은살도 의미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도훈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의미가 없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면 그 순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던 도훈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숨이 고요해졌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공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생각을 떨쳐내려 도훈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마음속 균열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멀리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택 안쪽에서는 아직도 축하연의 여흥이 남아 있는 듯, 희미한 불빛과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불빛은 도훈이 서 있는 공터까지 닿지 않았다. 도훈은 그 어둠 속에 혼자 서 있었다.
그날 밤, 도훈은 자정이 넘도록 공터를 떠나지 않았다.
주먹을 뻗고, 또 뻗었다. 몇 번을 반복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초식의 순서조차 의식하지 않고, 그저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것은 수련이라기보다는, 무언가에게 던지는 무언의 항변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공터 저편의 어둠 속에서 낯선 기척이 도훈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