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관도 위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왕도까지 남은 거리는 이틀.
시험 접수 마감까지는 나흘.
계산은 딱 맞았다. 문제는 늘 계산 밖에서 터진다는 거였다.
나는 강도현. 변경 무사 가문 강씨家의 삼남이다.
형 둘은 태어날 때부터 근육이 먼저 나온 사람들처럼 검을 쥐었고, 나는 반대로 책을 먼저 쥐었다. 집안 어른들은 그걸 두고 "핏줄이 섞였나" 하고 진심으로 의심했다. 뇌근 가문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이라니, 이 정도면 유전자 로또에서 오답을 뽑은 셈이었다.
큰형은 열두 살에 이미 성인 남자만 한 목검을 부러뜨렸다고 했다. 둘째 형은 열 살에 산짐승을 맨손으로 때려잡았다고 했다. 나는 열 살에 뭘 했더라. 아마 서고에서 몰래 훔쳐 온 시집을 읽다가 아버지한테 걸려서 등짝을 맞았던 것 같다.
"이 집안에 문관이 나올 줄이야."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는데, 그 웃음이 자랑스러움인지 헛웃음인지는 지금도 헷갈린다.
다행히 검술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지나치게 좋았다.
타고난 힘 '가속' 덕분이었다. 순간적으로 신체 반응 속도를 끌어올리는 힘인데, 형들 말로는 "쓸데없이 아까운 재능"이라고 했다. 문관이 되겠다는 놈에게 이런 힘을 준 하늘의 유머 감각도 참 지랄맞다고 생각했다.
가속을 처음 발견한 날, 나는 마당에서 형들과 대련을 하다가 얼떨결에 큰형의 목검을 튕겨낸 적이 있었다. 그날 온 집안이 뒤집어졌다. 아버지는 "드디어 우리 집안에 제대로 된 후계자가 나왔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 후계자가 사실은 검보다 붓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아버지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굳이 회상하고 싶지 않다.
어쨌든 나는 검이 아니라 붓으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문과 시험, 그것도 왕도 관리 선발시험. 붙으면 평생 검을 안 잡아도 되는 삶이 열린다. 형들처럼 매일 새벽에 일어나 산을 오르지 않아도 되고, 마물 사냥터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몸이 부서질 걱정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도, 말안장 뒤에 매단 짐 속에는 경전과 답안 예상집이 가득했다. 밤마다 촛불 밑에서 외운 구절들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웅웅거렸다. 예상 문제 삼십 개, 모범 답안 열두 개, 시험관 성향 분석까지 다 준비해 왔다. 완벽했다. 완벽했어야 했다.
그런데.
히이이잉!
말이 갑자기 앞다리를 치켜들며 울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삐를 당겼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안장에 매둔 짐이 덜컹, 떨어질 뻔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손을 뻗어 짐을 붙잡았다. 예상 답안집만은 지켜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이었다.
"뭐야."
앞쪽 숲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나무 그림자 사이로 시커먼 덩어리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크기는 대충 곰만 했는데, 곰이라면 저렇게 등에 뿔이 세 개씩 솟아 있진 않을 거다. 뿔 끝에서는 희끄무레한 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기가 응축된 흔적이었다.
마물이었다.
"하필."
나는 시험공부를 위해 검을 최소한으로 챙겨왔다. 최소한이라 함은, 정말 최소한. 호신용 단검 한 자루. 이 단검으로 할 수 있는 건 많아야 사과 깎기나 밧줄 자르기 정도였다.
인생이란 늘 이런 식이다. 준비가 부족할 때 꼭 시험에 나온다. 시험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건 시험이 아니라 그냥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관도 저편에서 마차 한 대가 덜컹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귀족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마차였다. 금박으로 두른 문양이 오후 햇살에 번쩍거렸다. 저 정도면 최소 백작가 이상이라는 소린데, 창문 커튼이 젖혀지지 않아 안에 누가 탔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마물이 그 마차를 향해 몸을 튼 건 순식간이었다.
"어이."
말릴 새도 없었다.
마부가 다급하게 방향을 꺾었지만, 마차 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크게 휘청거렸다. 말들이 놀라 앞다리를 허공에 휘저었고, 마부는 필사적으로 고삐를 잡아당기며 뭐라고 소리쳤다.
쿵!
마차가 옆으로 기울며 반쯤 넘어갔다.
안에서 여자 목소리 같은 게 짧게 새어나왔다.
비명이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습관처럼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문관 지망생다운 버릇이었다. 위기 상황에서도 손익을 따지는 걸 보면, 나는 정말로 이 집안에 잘못 태어난 게 맞았다.
지나간다: 시험에 늦을 확률 0%, 도덕적 죄책감 100%.
뛰어든다: 시험에 늦을 확률 상승, 목숨 위험 상승, 대신 사람 목숨 하나.
계산기가 고장 났는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사실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발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미친."
나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단검을 뽑아든 손이 벌써 저릿하게 떨려왔다. 이 정도 크기의 마물을 이 정도 무기로 상대한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니라 계란으로 바위를 깨겠다고 선언하는 수준이었다. 아니, 계란도 아니고 계란 껍질 정도였다.
머릿속으로 형들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도현아, 마물이랑 마주치면 절대 정면으로 안 붙어. 도망가."
지금 이 순간 그 조언이 참 유용하게도,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
마물이 앞발을 들어 마차를 향해 내려찍으려는 순간, 나는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순간 시야가 느려졌다.
가속.
먼지 한 톨이 공중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게 보일 정도로 세상이 늘어졌다. 마물의 거친 숨소리마저 저음으로 늘어져 들렸고,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회색빛 숨결이 마치 안개처럼 느릿하게 퍼져나갔다.
마물의 앞발이 서서히, 정말 서서히 마차 지붕에 닿기 직전이었다.
나는 이 틈에 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힘을 오래 쓸수록 몸이 못 버틴다는 거였다.
뇌는 빠른데 몸이 못 따라가면 결국 근육이 찢어진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최대 삼 초. 삼 초가 지나면 시야는 정상 속도로 돌아오고, 그때부터는 팔다리가 남의 것처럼 무거워진다. 예전에 훈련장에서 이 힘을 오 초 넘게 썼다가 사흘을 침대에서 못 일어난 적이 있었다.
삼 초 안에 승부를 봐야 했다.
머릿속으로 초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마물의 발톱 끝이 마차 지붕 나뭇결의 무늬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둘.
마차 문이 살짝 열렸고, 그 틈으로 창백한 얼굴 하나가 흘깃 스쳤다.
젊은 여자였다.
눈이 마주쳤다고 하기엔 너무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에 담긴 공포만은 또렷하게 박혔다. 살려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종류의 얼굴이었다.
셋.
그리고 그 순간, 마물의 발톱이 내 예상보다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