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왕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예상보다 더 큰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대문부터 금색으로 도금돼 있었다. 문고리조차 반짝거려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돈 지랄 보소, 라는 감상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이재헌은 정말 말대로였다. 은혜를 갚겠다며 왕도 내 저택 한 채를 통째로 내줬다. 마차에서 내려서 대문을 올려다보는데, 뒤따라온 마부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도련님. 정말 여기가 맞습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저도 처음 봐서."
마부는 뭔가 더 물으려다 말고 그냥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나도 딱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시골 무사 가문 삼남이 왕도 한복판에 이런 저택을 배정받았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시험 기간 동안 머물 곳이 필요했던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었지만,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마당만 해도 우리 본가 전체 부지보다 넓어 보였다. 정원수는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었고, 연못에는 진짜로 비단잉어가 헤엄치고 있었다. 저게 관상용이라고?
"뭐 이런 걸 다."
혼잣말을 하며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현관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타다닥, 하는 발소리가 먼저 들렸다.
"강도현 도련님이시죠?"
작은 체구에 밝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애였다. 나이는 나랑 비슷해 보였다. 앞치마를 두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도착하는 걸 보고 뛰어나온 모양이었다.
"누구세요."
"은채입니다! 재상님께서 이 저택에 배정해주신 전속 메이드예요."
전속 메이드라니.
시골 무사 가문 삼남한테 전속 메이드가 붙는 인생이라니.
인생 참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저는 딱히 필요 없는데."
"필요하고 안 필요하고를 왜 도련님이 정해요."
은채가 팔짱을 끼며 당당하게 받아쳤다. 그러고는 내 짐 가방을 냉큼 들어 올리더니, 무겁다는 티도 안 내고 성큼성큼 현관으로 걸어갔다.
건방진데, 유능해 보이긴 했다. 짧은 대화 몇 마디에서도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되죠?"
"시험 준비하시면 돼요. 저는 그냥 밥 챙기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도련님 사교계 데뷔도 좀 도와드리고."
"사교계는 됐어요."
나는 단칼에 잘랐다.
"저는 그냥 조용히 시험만 보고 갈 겁니다. 정치판이니 귀족들 모임이니,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은채가 눈을 깜빡였다.
"진짜요?"
"진짜요."
"에이, 다들 그렇게 말하다가 결국 끌려가던데."
"저는 다를 겁니다."
나는 이번 일로 뼈저리게 느꼈다. 재상이니 영애니 하는 사람들과 얽히면 골치 아파진다는 걸.
마물 한 번 잡아준 것만으로도 저택 한 채가 굴러들어왔다. 이 이상 얽히면 뭐가 굴러들어올지 무서웠다. 다음엔 영지라도 하나 던져주려나.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거렸다.
그냥 조용히 시험을 보고, 합격하면 지방 관리로 임명받아 소박하게 살고 싶었다.
그게 내 목표였다. 딱히 거창한 꿈도 아니었다. 그냥 남한테 안 얽히고, 조용히, 내 밥벌이 하면서 사는 것.
"뭐, 알겠습니다. 도련님 뜻이 그러시다면."
은채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런데 그 표정이 어딘가 미심쩍었다. 마치 '지금은 봐드릴게요' 하는 듯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렇게 며칠은 정말 조용하게 흘러갔다.
아침에 일어나 경전을 외우고, 낮에는 답안 예상 문제를 풀고, 저녁에는 은채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은채는 요리도 제법 잘했다. 특히 국물 요리는 본가에서 먹던 것보다 훨씬 깊은 맛이 났다.
"이거 무슨 국이에요?"
"영양탕이에요. 시험 준비하면 머리 많이 쓰시잖아요."
"오, 신경 써주네요."
"당연하죠. 제가 도련님 전속인데."
평화로웠다. 진짜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였다. 마물도 없고, 재상도 없고, 영애도 없고. 그냥 책과 밥과 잠.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싶었다.
그리고 딱 그 평화가 깨진 날, 은채가 봉투 하나를 들고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도련님, 초대장 왔어요."
"안 갑니다."
대답도 하기 전에 튀어나온 반사적인 거절이었다.
"이재헌 재상님 명의예요."
손에 든 붓이 뚝 멈췄다.
먹물이 종이 위로 한 방울 떨어졌다. 하필 답안 예상 문제 위에.
"……읽어보긴 하죠."
은채가 씨익 웃으며 봉투를 건넸다. 그 웃음이 왠지 '거봐요, 결국 그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요' 하는 느낌이라 살짝 얄미웠다.
왕궁에서 열리는 사교 연회 초청장이었다. 이재헌 재상 후원, 왕실 주최.
글씨체마저 화려했다. 금박 테두리에, 붓끝 하나하나가 정성스럽게 눌러 쓴 흔적이 보였다.
하단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번에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정식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건 무슨."
"완전 좋은 기회 아니에요? 왕도 사교계 데뷔! 게다가 재상님이 직접 초청하시는 자리라니."
"안 가요."
"안 가면 재상님 얼굴에 먹칠하는 거예요."
"……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네요."
은채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용히 시험만 보고 가겠다는 계획이 초장부터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겨우 며칠 평화롭게 살아보겠다고 했더니, 세상이 그걸 가만 안 두는구나.
"근데 왜 하필 은인 소개라는 명목으로."
"그거 좋은 명목이잖아요. 마물 잡아서 목숨 구한 영웅! 다들 궁금해할걸요."
"저는 영웅 되기 싫은데요."
"이미 늦었어요, 도련님."
늦었다는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저택 대문부터 금칠이 되어 있는데, 뭘 더 숨길 수 있겠나.
"딱 얼굴만 비추고 옵니다. 그거면 되죠?"
"물론이죠. 근데 도련님."
은채가 목소리를 낮췄다.
"거기 재상님 따님도 오신다는데."
순간 이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지친 눈빛.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던, 웃음기 없는 얼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글쎄요. 상관없으면 다행이고요."
은채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다시 붓을 들었지만, 왠지 글자가 눈에 잘 안 들어왔다.
책상 위에 놓인 초청장을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금박 테두리가 촛불에 반사돼 은은하게 빛났다.
이서연도 온다니.
그날, 마차 안에서 봤던 그 눈빛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삼키는 표정. 아버지가 시켜서 온 것 같은, 억지스러운 미소.
나는 붓을 내려놓고 초청장을 서랍에 밀어 넣었다.
그래봤자 얼굴만 비추고 오는 자리다. 별일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자꾸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건지.
나는 모르는 척 다시 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