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삼 초.
짧다고 하면 짧고, 길다고 하면 지옥같이 길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가 귀청까지 울렸다. 가속을 쓰면 세상이 늘어진다고 하지만, 정작 내 몸은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도 있는 힘껏 버둥거려야 했다. 남들 눈에는 순식간일 그 삼 초가, 내겐 숨 하나도 아까운 지옥의 시간이었다.
나는 마물의 발목 뒤쪽 힘줄을 향해 단검을 박아넣었다.
가속 상태에서는 검이 종이를 찢는 느낌으로 살가죽을 파고들었다. 실제로는 그렇게 부드러울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뇌가 시간을 늘려버리니 감각까지 왜곡되는 모양이었다.
크르릉!
마물이 몸을 뒤틀며 균형을 잃었다.
덩치는 곰만 한데 움직임은 뱀 같아서, 어디로 튈지 예측이 안 되는 놈이었다. 시골에서 마주치던 것들보다 두 배는 흉포했다.
그 틈에 마차 문을 발로 걷어차 완전히 열어젖혔다.
쾅!
"빨리 나와요!"
목이 다 갈라질 것 같았지만 소리는 그럭저럭 크게 나왔다. 안에서 누군가 손을 뻗었다.
중년 남자였다. 옷차림부터 심상치 않았다. 은실로 정교하게 수놓인 겉옷, 손가락마다 낀 반지들. 딱 봐도 시골 무사 가문 아들 눈에는 익숙지 않은 부류였다.
'저건 한 벌에 우리 집 반년 치 식량값은 나오겠는데.'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가 딸인 듯한 여자를 먼저 밀어내며 소리쳤다.
"서연아, 먼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별생각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저 마물의 다음 공격 타이밍이었으니까. 놈이 다시 몸을 세우려는 기색이 보였고, 다음 도약이면 마차째로 뒤집힐 수도 있었다.
나는 여자의 팔을 잡아 마차 밖으로 끌어냈다.
손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겁에 질린 사람 손이 다 이런가 싶다가도, 뭔가 이상하게 오래된 냉기 같다는 느낌이 스쳤다.
"괘, 괜찮으세요?"
여자가 나를 올려다봤다.
연분홍빛이 살짝 감도는 검은 머리, 보석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눈빛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남들은 마물 앞에서 오줌을 지려도 이상할 게 없는데, 이 여자는 무섭다기보단 뭔가 다른 걸 견디고 있는 눈이었다.
대답할 틈은 없었다.
마물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목덜미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저건 도약 직전의 신호였다.
가속을 두 번째로 쓰면 몸에 무리가 온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다시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세상이 다시 늘어졌다.
한 번은 어쩔 수 없다지만 두 번은 도박이었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처럼 아팠고, 눈앞이 잠깐 하얘졌다. 그래도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엔 목덜미였다.
단검을 최대한 깊게 박아넣고 몸을 비틀어 힘줄을 끊었다. 손목이 뻐근하게 저릴 정도로 힘을 줬다.
쿵.
마물이 옆으로 쓰러졌다.
정적이 흘렀다.
바람 소리도, 벌레 울음도 순간 다 지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가속 두 번 연속 사용의 대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서 있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일이 되어버리는 것.
"자, 자네."
중년 남자가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 죽을 뻔한 사람 특유의, 뒤늦게 밀려오는 공포가 온몸에서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이름이 뭔가."
"강도현입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예의는 지켰다. 무사 가문의 최소한의 미덕이었다. 삼남이라 물려받을 거 하나 없어도, 배운 예의는 몸에 새겨진 습관 같은 거였다.
"나는 이재헌이라 하네."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재헌.
왕국 실세, 재상. 국왕보다 목소리가 더 크다는 소문의 그 남자.
시골에서도 그 이름을 모르면 나무꾼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저잣거리에서도, 주막에서도, 어느 술자리에서든 정치 얘기가 나오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이름.
내가 지금 구한 사람이 그 이재헌이라고?
머리가 핑 돌았다. 방금 전까지는 마물 힘줄이 문제였는데, 이제는 이름 하나가 나를 흔들어놓고 있었다.
"재, 재상님이셨습니까."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체력이 바닥나서인지, 놀라서인지 나 자신도 헷갈렸다.
"그렇다네. 그리고 이 아이는 내 딸, 서연이일세."
서연이라는 여자가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서연입니다. 도움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차분했지만, 눈빛 어딘가에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방금 마물에게서 살아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치고는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죽다 살아난 사람이라면 안도의 눈물이든, 겁에 질린 헛웃음이든 뭔가 터져 나와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이서연은 그냥, 지쳐 있었다. 마치 오늘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전부터 지쳐 있던 사람처럼.
"자네, 왕도로 가는 길인가?"
"네. 문관 시험을 보러 가는 길입니다."
이재헌의 눈이 반짝였다.
그 반짝임의 의미를 나는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냥 은인에게 고마워하는 눈빛이라고만 생각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삼남이라 그랬다고 하면 딱 맞는 말일 거다.
"허, 이런 인연이 있나. 우리도 왕도로 가는 길이었네. 자네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네."
"별말씀을요. 우연히 지나가다 도운 것뿐입니다."
나는 최대한 겸손하게, 그리고 최대한 이 대화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말했다.
귀족과의 인연이란 건 시골 무사 가문 자식에게는 딱히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대부분 뒷일이 복잡해지니까. 아버지가 늘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귀족은 밥상에 올려놓은 생선 같은 거다, 맛있어 보여도 가시를 잘못 삼키면 목에 걸려 죽는다고.
지금 내 목에 걸린 생선 가시가 바로 이거였다.
이재헌이 딸 쪽을 슬쩍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서연이가 얼마 전부터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았는데, 오늘 이런 일까지 겪었으니."
이서연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아버지."
딱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짧지 않았다. 원망 같기도 하고, 부탁 같기도 하고, 경고 같기도 한.
"아, 미안하구나. 자네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
뭔가 있구나.
나는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다. 저 짧은 대화 속에서 뭔가 불편한 사정이 숨어 있다는 걸 감지했다.
아버지가 딸의 상태를 저렇게 애매하게 언급하는 것도, 딸이 그 말을 단칼에 자르는 것도, 둘 다 평범한 부녀 사이에서 나올 반응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그저 시험 보러 가는 지방 출신 무관 지망생일 뿐이었다. 재상가의 속사정 따위,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신분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요."
일부러 시험 얘기를 다시 꺼냈다. 이 자리를 뜰 명분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럴 순 없지."
이재헌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를 이런 은혜만 받고 그냥 보낼 수는 없네. 왕도에 도착하면 내 저택으로 오게. 최소한의 사례는 해야지."
나는 정중히 거절하려 했다.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뭔가를 받겠다고 재상 저택까지 들락거리는 건, 내가 그리던 삼남 인생 계획에 전혀 없는 시나리오였다. 조용히 시험 보고, 조용히 관직 하나 얻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 그게 다였다.
하지만 재상이라는 인간이 저런 눈빛으로 밀어붙이면, 시골 삼남 따위가 버틸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반박할 말을 몇 개 떠올려봤지만, 하나같이 재상 앞에서 꺼내기엔 무례하거나 유치했다.
"……알겠습니다."
이서연이 나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그 시선이 유난히 오래 머물렀던 것 같은 건, 그냥 내 착각이었을까. 아니면 방금까지 지쳐 있던 그 눈빛이, 이 순간만큼은 뭔가 다른 걸 담고 있었던 걸까.
나는 굳이 그 답을 캐묻지 않았다. 캐물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촉이 강하게 왔으니까.
마차가 다시 굴러가는 걸 지켜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가속을 두 번 쓴 후유증인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를 감지한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뭔가 시작됐다는 느낌이었다.
좋지 않은 종류로.
멀어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문관 시험 합격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훨씬 현실적인 목표였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발이 무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