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검 대신 붓을 들기로 했다

4화

연회장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샹들리에가 촛불로 반짝였고, 바닥은 대리석으로 매끄러웠다. 여기저기서 비단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낮은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돈 지랄 보소, 두 번째.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만 해도 우리 집 한 채 값은 될 것 같았다. 아니, 이 세계에 집값 개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만, 감으로 그렇다는 거다. 눈이 즐겁긴 한데 동시에 위축되는 이 기묘한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나는 은채가 골라준 옷을 입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벽 근처에 붙어 있었다. 관찰자 모드. 이게 오늘의 목표였다. 얼굴만 비추고, 눈에 안 띄고, 조용히 사라진다. 간단한 목표였다. 초등학생도 지킬 수 있는 수준의 미션이라고 생각했다. 계획은 늘 계획대로 안 흘러간다는 게 인생의 진리였다. 벽에 등을 붙이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 옷차림이나 구경하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갈 줄 알았다. 실제로 오 분 정도는 그랬다. 온갖 색깔의 드레스와 자수 놓인 예복들이 지나갔고, 나는 그걸 보며 '저건 얼마짜리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있네." 이재헌이 사람들 무리를 뚫고 다가왔다. 머리가 핑 돌았다. 발각됐다는 걸 직감했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강도현 군, 왔구먼." "네, 재상님.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게 나온 것 같은데, 상대는 신경 안 쓰는 눈치였다. "별말을. 자, 소개하지." 그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 이서연이 서 있었다. 오늘은 화려한 청록색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는 정갈하게 올려 묶었고, 목에는 얇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연분홍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조명 아래서 유난히 부드럽게 빛났다. 지난번 저택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화사한 인상이었다. 그때는 지쳐 보이는 눈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오늘은 그 위에 옅은 생기 같은 게 얹혀 있었다. "다시 뵙네요, 강도현 님." "……네. 다시 뵙습니다." 나는 최대한 무난하게 인사를 건넸다. 관찰자로 남고 싶었지만, 이미 재상 딸의 정면에 서 있는 시점에서 그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였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 구명조끼를 찾는 심정이었다. "강도현 님 이야기는 아버지께 많이 들었어요. 마물을 그렇게 순식간에."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이라기엔 지나치게 정확한 검이었다고 하던데요." 이서연이 살짝 웃었다. 지친 눈빛이 아니라, 오늘은 조금 다른 눈빛이었다. 뭔가 흥미로워하는 것 같은. 왜 저렇게 관심 있어 하는 표정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정확한 검이라니. 사실을 말하면 그때 나는 살려달라는 마음으로 검을 뻗었을 뿐이고, 거기에 무슨 정교한 계산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정정해줄 이유는 없어 보였다. 괜히 겸손 떨다가 의심받는 것보다는 그냥 넘어가는 게 나았다. 대화가 몇 마디 더 이어질 무렵, 누군가 이서연 옆으로 다가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어머, 여기 있었네, 서연아." 금발을 화려하게 늘어뜨린 여자였다. 눈매가 날카로웠고,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쳤다. "이분이 그 은인이야?" "선하윤, 인사해. 강도현 님이셔." 선하윤이라는 여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발끝에서 시작해 얼굴까지 천천히 올라오는데, 그 속도가 은근히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무례하다고 느낄 새도 없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문 들었어요. 마물 한 마리를 단검 하나로 잡았다고요?" "그런 셈입니다." "거짓말 같은데." 딱 잘라 말하는 태도에 나는 순간 말이 막혔다.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이라 대응 매뉴얼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다들 놀라거나 감탄하거나, 혹은 의심스러워도 겉으로는 예의를 차렸는데, 이 여자는 대놓고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다. "믿으셔도 됩니다." "글쎄요. 이런 자리에선 다들 자기 얘기를 좀 부풀리잖아요." 선하윤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살폈다. 뭔가 시험당하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시험이었다. "하윤아, 그러지 마." 이서연이 눈치를 주듯이 말했지만, 선하윤은 어깨를 슬쩍 들썩였다. "그냥 궁금해서. 정말 그렇게 강하면, 뭐 하나 증명해봐요." "여기서요?" "저기 정원에 검술 대련장이 있는데." 나는 이마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관찰자로 남으려던 계획이 완전히, 완벽하게, 물리적으로 붕괴하고 있었다. 이건 그냥 시험이 아니라 함정에 가까웠다. 대련장에 나가서 뭐라도 보여주면 그날로 나는 검사 취급받으며 최전선에 끌려갈 거고, 실력이 별 볼 일 없다는 걸 들키면 그날로 사기꾼 취급받는다. 어느 쪽이든 지옥행 급행열차였다. 문관 시험을 코앞에 둔 몸으로 검술 대련이라니, 이건 무슨 하드모드에서 헬모드로 난이도 강제 전환당하는 기분이었다.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문관 시험을 보러 온 사람이라." "에이, 재미없게." 선하윤이 입술을 삐죽였다. 이재헌이 그 사이에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계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시선의 의미를 나는 그때도 몰랐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 눈빛이 이후에 벌어질 모든 일의 서막이었다는 걸 알았겠지만, 그 순간의 나는 그냥 이 대화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연회는 계속됐고, 나는 사람들 시선을 피해 벽 쪽으로 다시 물러나려 했다. 발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위기를 넘긴 셈이었다. 이제 남은 목표는 하나, 조용히 얼굴만 비추다가 눈치껏 빠져나가는 것. 하지만 그 순간, 이서연이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발소리도 크지 않았다. 어느새 옆에 서 있는 걸 인지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괜찮으세요? 하윤이가 좀 짓궂죠." "익숙해질 것 같습니다." 이서연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이 처음으로 지쳐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목걸이에 걸린 작은 보석이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별거 아닌 디테일인데 왜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저, 잠깐 밖에 바람 좀 쐬러 가려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재상 딸과 단둘이 정원으로. 이건 누가 봐도 좋은 그림이 아니었다. 나중에 무슨 소문이 어떻게 돌지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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