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스승님, 정체가 뭐예요?

2화

우리가 청류진으로 파견되기 전, 기사단 본부에서 있었던 마지막 면담을 나는 지금도 세세하게 기억한다. 그날 회의실 창문으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는데, 그 빛이 이강철 대장님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유난히 하얗게 비추던 것까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대장님은 그 서류철 안에서 두 개의 봉인된 서신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고, 그것을 우리 앞으로 하나씩 밀어주며 말씀하셨다. "이건 청류진의 한지운이라는 인물에게 전할 추천서다. 그 사람 밑에서 수련을 받도록 해라." 봉인된 서신이라니, 뭔가 거창한 인물인가 싶어서 나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사단이 정식으로 추천서를 써줄 정도의 인물이라면 적어도 그럭저럭 이름값이 있는 사람이겠거니 짐작했던 것도 그때였다. "한지운이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내가 묻자, 대장님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만 답하셨다. "B랭크 모험가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그 말이 그때는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B랭크라면 나쁘지 않은 실력자였고, 겉모습과 실제가 다르다는 말도 흔히 하는 격언 정도로만 받아들였으니까. 그런데 술집에서 그 사람을 직접 보고 나서야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뒤늦게 곱씹게 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가 다르다니, 겉모습이 저 정도로 형편없는데 실제는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는 뜻이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대장님이 그 말을 할 때 지었던 표정, 어딘가 미묘하게 웃음을 참는 듯한 그 표정까지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시 떠오르는 걸 보면, 나는 그때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게 분명했다. 선보라 대사님 역시 서채린에게 비슷한 말씀을 남기셨다고 했다. 서채린이 마차 안에서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 요약하자면 선보라 대사님은 한지운이라는 사람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듯했고, 그 인연을 근거로 서채린을 그에게 맡긴 모양이었다. 다만 그 인연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서채린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스승님이 그러셨어요. 한지운의 배우자였던 한서연이라는 분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였다고. 그 이상은 말씀 안 하셨지만요."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서채린의 목소리도 함께 흔들렸는데, 그 흔들림 속에서도 그녀는 꽤 담담하게 그 말을 전했다. 배우자라는 말에 나는 잠시 놀랐다. 술집에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 모습과, 배우자가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헤어졌거나, 혹은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이겠거니 짐작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서채린도 더 이상 말을 얹지 않았다. 나 역시 굳이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봐야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정보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 한서연이라는 분은 지금 어디 계신 건데?" 내가 묻자 서채린은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는 저도 몰라요. 스승님도 거기서 말을 끊으셨거든요." 그 대답을 듣고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마차 안의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하나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대장님이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는데, 그건 다음과 같았다. "기한은 한 달이다. 그 안에 한지운이 너를 정식 제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수련 자격은 취소되고 곧바로 본부로 복귀해야 한다." "인정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겁니까?" "그건 그쪽에서 알려줄 거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인정을 받는 방법조차 정해지지 않은 채로, 인정을 못 받으면 파견이 취소된다는 조건만 걸려 있다니, 이건 시험이 아니라 도박에 가까운 처사였다. 애초에 시험이라면 채점 기준이라도 알려줘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기한만 있고 방법은 없는 시험이라니, 이게 무슨 놀부 심보 같은 조건이란 말인가.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었고, 나는 그것을 거스를 만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청류진에 도착했고, 그 시한부 조건은 이미 사흘이 지나가고 있었다.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한 달을 서른 날로 잡으면 남은 시간은 스물일곱 날. 그 안에 저 술집에서 봤던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나는 그날 밤 여관 방에 누워서도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관 방 천장의 나뭇결을 세다시피 하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인정을 받는다는 게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검을 몇 번 맞춰보고 되는 걸까, 아니면 무슨 심부름을 시키고 그걸 통과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그냥 그 사람 기분에 따라 결정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대장님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가 다르다고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그 말을 곱씹을수록 오히려 불안감만 커져갔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저 정도로 형편없다면, 실제로 인정 기준이라는 것도 형편없이 제멋대로일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옆방에서 서채린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벽 너머로 그 소리를 들으며, 우리 둘 다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도장을 찾았다. 도장 앞마당에는 밤새 내린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아 흙바닥이 축축했고, 그 위로 아침 햇살이 얇게 깔려 있었다.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쪽에서 낮게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이번에는 한지운이 도장 안에 있었다. 정확히는 마루 한켠에 걸터앉아 하품을 하고 있었는데, 어제 술집에서 봤던 그 흐트러진 몰골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나는 순간 어제 일이 데자뷰처럼 겹쳐 보였다. 옷차림만 바뀌었을 뿐, 표정도 자세도 어제와 거의 똑같았다. '설마 아직 술이 안 깬 건가.' 그런 의심이 잠깐 스쳤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를 발견한 순간 나는 최대한 정중한 태도로 다가가 다시 인사를 건넸다. "어제 인사드렸던 이하준입니다. 정식으로 수련을 청하고 싶습니다." 한지운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듯한 느낌이라 나는 괜히 옷깃을 만지작거렸는데, 그는 대뜬 이렇게 물었다. "기한이 있다고 들었는데, 며칠 남았지?" "스물일곱 날 남았습니다." 그는 그 대답을 듣더니 픽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어딘가 사람을 얕보는 듯한 뉘앙스를 담고 있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옆에 서 있던 서채린도 그 웃음을 놓치지 않았는지, 살짝 미간을 좁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내 마음에 안 들면 짐 싸서 가는 거고."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물었다. 속으로는 이미 몇 가지 시나리오를 그려보고 있었는데, 검술 시험이든 뭐든 일단 시작이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글쎄. 일단은."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도장 안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 손짓 하나에도 별다른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이 사람이 정말로 B랭크 모험가가 맞나 하는 의심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저기 김도진이랑 붙어봐. 그거 보고 결정할 거니까." 도장 안쪽 그늘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체격이 크지는 않았지만,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 있는 게 눈에 보였고, 눈빛도 어딘가 서늘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운이 풍겼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이 조금 놓였는데, 적어도 검을 통해 뭔가를 보여줄 기회가 생긴 거니까 그 자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실력으로 평가받는 거라면 차라리 명확하니까, 애매한 기준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한지운의 다음 말이, 그 안도를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참고로 김도진, 이 도장에서 나 빼고 제일 강한 놈이야. 잘 버텨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방금까지 품고 있던 안도감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꺼지는 걸 느꼈다. 저 사람이 진짜로 이 도장에서 두 번째로 강하다면, 나는 지금 첫 시험부터 최악의 상대를 만난 셈이었다. 김도진이라는 사내는 이미 팔을 가볍게 풀며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그 표정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어서 오히려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스물일곱 날이나 남았는데, 첫날부터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검자루를 고쳐 잡았지만, 손바닥에 스며드는 땀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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