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해동국, 청람학원 후원.
죽은 나무 아래 소년이 홀로 앉아 있었다.
이운소, 열다섯.
나무는 이미 삼 년 전에 죽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저 뿌리가 썩어 말라죽었다고 했다.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아무도 그 나무를 베어내지도 않았다.
학원 사람들은 그 자리를 꺼렸다.
죽은 나무 아래에는 늘 이운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래보다 마른 몸, 창백한 얼굴, 그리고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법을 모르는 눈빛.
바람이 마른 가지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스스스'
낙엽 몇 장이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이운소는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목을 들어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소맷자락을 걷어 올린 팔뚝 위, 푸르스름한 핏줄 대신 말라붙은 회색 실선이 살가죽 아래로 뻗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말라버린 강바닥의 균열 같았다.
경맥 건조(經脈乾燥).
태어날 때부터 그의 몸에 새겨진 저주였다.
무도를 익히려면 경맥을 타고 기가 흘러야 했으나, 그의 경맥은 마른 강바닥처럼 갈라져 있어 단 한 줌의 기운도 담아내지 못했다.
스승들은 그를 진맥할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이는 안타까운 눈으로, 어떤 이는 흥미를 잃은 눈으로.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학원 사람들은 그를 '폐인'이라 불렀다.
대놓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이운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 법을 배운 게 아니라, 신경 쓸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다만 가끔, 아주 가끔, 잠들기 직전이면 낯선 기억의 파편이 스쳐 지나갔다.
검을 든 손.
무너지는 하늘.
피로 물든 대지 위에서 홀로 서 있던 누군가.
처음에는 단순한 꿈이라 여겼다.
하지만 꿈은 십오 년째 반복되었고, 반복될수록 선명해졌다.
꿈이라기엔 너무 구체적이었다.
손끝에 닿는 검 자루의 무게감,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 발밑에서 느껴지는 갈라진 대지의 감촉까지.
"크윽..."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이운소는 이마를 짚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또 시작이군.'
십오 년째였다.
밤마다, 때로는 낮에도 불쑥, 찾아오는 이 낯선 기억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선명했고, 동시에 지독하게 익숙했다.
검을 쥔 손의 감촉, 하늘을 찢는 검기의 궤적, 그리고 마지막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고비양... 네놈은 결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사실이, 이운소를 매번 소름 돋게 만들었다.
고비양.
자신의 이름은 이운소였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마다 심장이 반응했다.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부르는 소리처럼.
이운소는 다시 눈을 떴다.
후원의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바람은 차가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학당.
교실 안은 언제나 그렇듯 소란스러웠다.
누군가는 어제 배운 술식을 자랑했고, 누군가는 이번 평가에서 몇 등급을 받을지 내기를 걸었다.
이운소는 맨 뒷자리, 창가 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무도 그 옆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이운소."
담임 서은하가 그를 불렀다.
스물여덟, 4상경계 2성의 대무사이자 고급 술련 학도인 그녀는 청람학원에서 가장 엄격한 교관으로 통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곧게 선 자세, 흰 제복 위에 걸친 검은 로브.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서늘했다.
그녀가 교단에 오르는 순간, 교실 안 소음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네."
이운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 안 삼십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그 시선들 속에는 호기심도, 조롱도, 그리고 약간의 동정도 뒤섞여 있었다.
"오늘은 실전 술련 평가일이다. 다들 준비해왔겠지."
서은하의 시선이 이운소에게 멈췄다.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망설임 같기도 했고, 동정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너도 예외는 아니다."
웅성거림이 일었다.
누군가 낮게 킥킥거렸다.
"또 볼거리 생기는 거냐."
뒷자리에서 누군가 소곤거렸다.
이운소는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발걸음마다 등 뒤로 시선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경맥이 건조합니다. 기초 발현조차 되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
서은하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마치 이미 백 번은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듣는 듣한 어조였다.
"그럼에도 평가는 공정해야지. 네가 못한다고 예외를 두면,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불공평한 일이 될 것이다."
뒤쪽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귀족파의 우두머리, 강도윤이었다.
열다섯의 나이에 이미 7도 경맥을 완전히 개통해 1원경 무사 진입을 눈앞에 둔 천재.
그의 옷차림은 다른 학도들과 확연히 달랐다.
값비싼 비단으로 지은 겉옷, 허리에 찬 명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만만한 태도.
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려 있었다.
"선생님, 어차피 안 되는 놈에게 시간 낭비할 필요 있습니까? 그냥 낙제 처리하시죠."
주변에서 몇몇이 동조하듯 웃음을 흘렸다.
강도윤을 따르는 무리, 귀족파 자제들이었다.
"강도윤."
서은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발언 순서를 지켜라."
하지만 그 말에도 미묘한 동조의 기색이 섞여 있었다.
이운소는 그 미세한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선생조차 나를 이미 낙제생으로 보고 있군.'
씁쓸한 감정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이내 삼켜졌다.
익숙한 감정이었다.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서글펐다.
"이운소, 앞으로 나와 술식을 그려봐라. 가장 기초적인 것도 상관없다."
서은하가 명령했다.
이운소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교실 중앙, 술식판 앞.
술식판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의 손이 그 위를 스쳐갔을 것이다.
그중에 자신처럼 아무것도 그려내지 못한 이는 몇이나 있었을까.
손끝으로 술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 삼각, 다시 원.
기초 중의 기초, 36수법의 첫 수식이었다.
동작 하나하나는 완벽했다.
수백 번, 수천 번 연습한 손놀림이었다.
하지만 경맥이 건조한 그에게는 그 술식에 기운을 담을 방법이 없었다.
그림은 완성됐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정적.
"역시."
누군가 비웃었다.
"봐라, 낭비라고 했잖아."
강도윤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감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마치 자신의 우월함을 재확인받은 것처럼.
서은하의 표정이 굳었다.
동정도 아니었고,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지친 실망감이었다.
"이운소."
그녀가 낮게 말했다.
"너는 학원에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다음 학기부터 특수반으로 전출을 신청하겠다."
특수반.
그곳은 사실상 퇴학 직전의 낙제생들을 모아두는 명분상의 배려였다.
정식으로는 '개별지도반'이라 불렸지만, 학원 안에서 그 이름을 진지하게 부르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그곳을 '쓰레기장'이라 불렀다.
"...특수반이요."
이운소가 반복했다.
목소리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그러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한백만이 얼굴을 굳혔다.
그는 무장파 자제였으나 이운소와 가까운 몇 안 되는 이였다.
체격이 크고 다소 우직한 인상의 소년으로, 검술보다는 정직함으로 알려져 있었다.
"선생님, 그건 좀 심한 처사가 아닙니까."
한백만이 나섰다.
"조용히 해라, 한백."
서은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학생 개인을 위한 배려다."
배려라는 단어가 얼마나 잔인한 방식으로 쓰일 수 있는지, 이운소는 그 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밀어내는 법을, 이 세계는 이토록 능숙하게 알고 있었다.
"..."
이운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관자놀이가 다시 지끈거렸다.
또 그 기억이었다.
검을 든 손.
무너지는 하늘.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낯선 남자의 얼굴이었다.
분노에 차 있었고, 동시에 두려움도 섞여 있었다.
그 얼굴이 입을 열었다.
'네놈이... 파멸검제라고?'
적의로 가득한 목소리.
비웃음.
그리고 등 뒤에서 박히는 배신의 검.
차가운 쇠붙이가 살을 뚫고 들어오는 감각이, 이운소의 등줄기를 타고 실제로 흘렀다.
"크윽!"
이운소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손끝이 떨렸다.
술식판 위, 그가 그린 원과 삼각형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치듯 지나갔다.
'번쩍!'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너무나 짧아서, 눈을 한 번 깜빡였다면 놓쳤을 것이다.
서은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그건 뭐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확신이 아닌 의문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옮겨 술식판 가까이 다가갔다.
술식판 위, 방금 빛이 스쳤던 자리를 손끝으로 훑었다.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착각인가."
하지만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착각이었을까.
서은하는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저었다.
오랜 세월 술식을 다뤄온 그녀의 감각이 착각을 일으켰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술식판에는 아무런 반응도,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됐다. 오늘 평가는 여기까지. 이운소, 서류는 내일까지 제출하도록."
교실 안,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정리하며 웅성거렸다.
강도윤이 자리를 지나며 이운소의 어깨를 가볍게 부딪히고 지나갔다.
"수고했다, 폐인."
낮은 목소리로 던진 조롱이었다.
주변에서 몇몇이 웃음을 흘렸다.
이운소는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방금 스쳐 지나간 빛의 잔상을 바라보았다.
한백만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냐."
"괜찮다."
이운소가 짧게 대답했다.
한백만은 뭔가 더 말하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다.
교실이 비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운소는 술식판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손끝에 남아있는 감각.
방금 그 빛이 스쳐 지나갈 때, 분명히 무언가가 반응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그의 몸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건... 내 것이었다.'
낯선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십오 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그 검을 든 손, 무너지는 하늘, 피로 물든 대지의 기억이 처음으로 손끝의 감각과 겹쳐졌다.
이운소는 자신의 팔뚝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말라붙은 회색 실선.
경맥 건조의 흔적.
하지만 방금 그 순간, 그 실선 어딘가에서 아주 미약하게,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마침내, 눈을 뜨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