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웃음거리인데, 검제였다

4화

청람학원, 뒤편 훈련장. 정오의 해가 머리 위로 곧게 떨어지는 시각이었다. 훈련장 한쪽 구석, 낡은 목책 아래에서 강태호가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악!" 짧고 날카로운 신음이었다. 오른팔을 붙잡은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팔뚝의 피부 아래로 실선처럼 뻗어 있던 그 검붉은 자국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번져나갔다. 이운소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훈련장 흙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정오마다 이런가?" 이운소가 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강태호는 순간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통에 젖어 있던 얼굴에, 경계심이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우수 3혈맥 부위에서만 통증이 온다. 게다가 딱 정오 시간대. 이 정도면 흔한 부작용이 아니지." 이운소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 혈맥을 확인했다. 검붉은 실선이 마치 뱀처럼 피부 아래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맥을 타고 흐르는 그 기운은 정상적인 술식의 잔재가 아니었다. 음습하고, 무겁고, 어딘가 부패한 듯한 기운이었다. "음풍석(陰風石)." 이운소가 낮게 중얼거렸다. 강태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잡혀 있던 손목을 황급히 빼려 했지만, 이운소의 손은 이미 그의 혈맥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술련사 공회 규정상 사용이 완전히 금지된 물건이다. 승급 시험 부정행위에 쓰였겠지." 음풍석은 특정 술식의 발현 속도를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금지 도구였다. 효과는 즉각적이지만, 사용자의 혈맥에 검은 독기를 남겨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을 유발했다. 처음에는 미미한 저림 정도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의 주기가 짧아지고 강도가 심해지는 것이 이 독기의 특징이었다. 술련사 공회는 부정행위 방지 차원에서 이를 극악한 중죄로 규정했고, 발견 시 즉각 자격 박탈에 더해 형벌까지 내려졌다. 가문 소속의 술련사라면, 그 가문의 명예에도 치명적인 흠결이 남는 일이었다. "5일 전, 사급 승격 시험 때 썼겠군." 이운소가 정확히 짚어냈다. 강태호는 이를 악물었다.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반응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부정할 말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얼굴에 드러난 낭패감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발, 소문내지 말아줘." 그가 이운소의 옷깃을 붙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거 걸리면 나는 끝이야. 자격 박탈은 물론이고, 가문에서도 쫓겨난다." 이운소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자신을 향해 '폐인'이라 비웃었던 자였다. 그런 자가 지금은 옷깃을 붙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부탁을 하려면 자세를 좀 갖춰야 하지 않나." "...뭐?" "방금 전까지는 나를 이름으로만 부르지 않았나. 게다가 이틀 전까지 나를 '폐인'이라 불렀던 자였지, 강태호." 강태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노와 굴욕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목 끝까지 치미는 반발심이 있었지만, 그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팔뚝을 타고 도는 통증이 다시 한 번 스멀거리며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부탁드립니다."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방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운소가 흥, 하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들었나." "학원에...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대강당에서 그 신기법을 시연한 후로, 당신이 술련사 공회의 수준을 뛰어넘는 존재라고." 이운소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음풍석 중독은 정통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술련사 공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부정 도구였기에, 공식적인 해독법이 마련될 리 없었다. 공회의 의술사들조차 이 독기 앞에서는 대증 요법만을 처방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파멸검제 고비양의 기억 속에는, 화선대륙 전역의 온갖 금지 술식과 독물에 대한 지식이 남아 있었다. 그 시절, 고비양은 전장에서 온갖 사악한 술식과 마주쳤고, 그 하나하나를 분석해 대처법을 몸에 새겼다. 음풍석 역시 그 기억의 서랍 어딘가에 잠들어 있었다. "...할 수는 있다." 이운소가 말했다. 강태호의 눈이 반짝였다. 방금 전까지의 절망 대신, 희미한 희망이 그 눈동자에 번져갔다. "단, 조건이 있다." "뭐,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앞으로 나에 대해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는 서로 침묵하는 거다." 강태호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부러질 듯 빠른 끄덕임이었다. 이운소가 손을 뻗어 그의 손목 혈맥 위에 검지를 짚었다. 낮은 목소리로 짧은 술식을 읊었다. 입에서 흘러나온 구결이 공기를 타고 손끝으로 흘러들었다. '스으윽' 검붉은 독기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검은 잉크가 물속에서 퍼져나가다가 서서히 흩어지는 것처럼, 혈맥을 타고 흐르던 그 음습한 기운이 조금씩 옅어졌다. 완치는 아니었으나, 최소한 정오마다의 극심한 통증은 억제될 수준이었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근본적인 해독법은 시간이 걸릴 거다." "그, 그래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태호가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의 굴욕적인 자세는 이미 잊은 듯,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감사함,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짙은 원한. '이 자식... 언젠가 반드시 갚아주겠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는 여전히 약간의 경직이 남아 있었다.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굴욕이 채 가시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운소는 그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감사와 원한이 함께 서린 눈빛이군. 익숙한 조합이지.' 전생에서도 그런 자들을 여럿 봐왔다. 도움을 받고도 그 도움 때문에 굴욕을 느끼는 자들. 그들의 원한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곤 했다.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빚이자 상처가 되는 법이었다. 언젠가 그 빚을 다른 방식으로 되갚으려 할 것이다. 이운소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생, 고비양의 곁에도 그런 자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 대부분은 결국 등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훈련장 위로 부는 바람이 흙먼지를 날리고, 정오의 해는 이미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이운소는 옷자락을 툭툭 털며 몸을 돌렸다. ※※※ 며칠 후, 학원 밖 시내. 이운소는 학원 근처의 작은 찻집에 앉아 있었다. 서은하가 소개해준 술련 자료를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경맥 회복에 관한 자료는 극히 드물었지만, 서은하는 그녀가 아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몇 가지 문헌을 구해주었다. 그녀의 가문이 소유한 서고에서 몰래 빼온 것도 있었고, 아는 술련사에게 부탁해 빌린 것도 있었다. "이거 다 보고 나면 꼭 돌려줘야 해. 특히 이 세 번째 것은 우리 가문 서고 목록에도 없는 물건이니까." 그녀가 그렇게 당부하며 건네준 문헌들이었다. 찻집 안은 조용했다. 탁자 위에는 낡은 서책 몇 권이 펼쳐져 있었고, 이운소는 그 위로 손가락을 짚어가며 문장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시내의 소음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행인들의 발소리, 상인의 호객 소리, 그리고 이따금 지나가는 마차의 바퀴 소리. 그때, 찻집 문이 열리며, 낯선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잠깐 훅 들이쳤다. 허름한 회색 로브를 걸쳤지만, 그 걸음걸이에서 느껴지는 안정감은 결코 평범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흐트러짐 없이 일정한 보폭을 유지했고, 그 무게중심은 마치 오랜 세월 단련된 무인의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남자는 곧장 이운소가 앉은 자리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 어떤 허락도 구하지 않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누구십니까." 이운소가 경계하며 물었다. 문헌을 덮고, 손을 탁자 아래로 슬며시 내렸다. "양지훈이라 하네." 남자가 담담하게 이름을 밝혔다. "전 해동국 분회장, 현재는 술련사 공회 4급 군급 술련사로 있지." 이운소는 그 명칭을 듣고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군급 술련사는 흔한 지위가 아니었다. 술련사 공회 전체를 통틀어도 극소수만 도달하는 위계였다. 공회 내에서도 군급 이상은 실질적으로 국가 단위의 정책 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자리였고, 그만큼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자리였다. "저에게 무슨 용건이십니까." "용건이라... 자네가 며칠 전 대강당에서 시연했다는 그 술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네." 양지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찻집의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도, 그 눈만은 유난히 또렷했다. "12식 신기법, 만천화우와 파산붕. 정확히 그 두 가지를 시연했다지." 이운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남자는 단순한 소문을 듣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언급한 기술명은 소문 속에서 흘러다니는 애매한 이름이 아니라, 정확한 명칭 그 자체였다. "...그 술식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느냐고?" 양지훈이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조롱의 웃음이 아니라, 무언가 오래된 상처를 되짚는 자의 웃음이었다. "내가 그 술식을 교과서로 편찬한 사람이다." 이운소는 숨을 들이켰다. 찻잔을 쥐고 있던 손끝에 미세한 힘이 들어갔다. "20년 전, 나는 화선대륙에서 파멸검제 고비양의 유고를 전승받았다. 그가 남긴 미완의 12식 신기법 초본을 발견해 정리하고 체계화한 게 나였지." 찻집 안,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탁자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고, 그 사이의 공기가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술식은, 그 남자가 죽은 후 단 한 번도 완전한 형태로 재현된 적이 없었다. 초본만 남아 있었을 뿐, 실제 발현법은 유실됐거든." 양지훈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탁자 위에 놓인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흥분인지, 경계인지, 혹은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떨림이었다. "그런데 열다섯 살짜리 학생이, 그 완전한 형태를 시연했다는 소문이 돌아. 정확히, 원본 그대로." 이운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20년을 그 잔결을 뒤쫓아온 자의 눈빛이었다. "이운소 학생." 양지훈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에는 의심과 경이, 그리고 어떤 절박함까지 뒤섞여 있었다. "자네는... 도대체 누구인가."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