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청람학원, 대강당.
다음 날 정오, 학원 전체 참관 평가가 열렸다.
분기별로 치러지는 이 행사는 전 학년이 모여 우수 학생들의 술련 시연을 참관하는 자리였다.
학원의 위계질서를 재확인시키는 자리이기도 했다.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에 있는지, 모두가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
서은하는 이운소의 특수반 전출 서류를 이 자리에서 공식 발표할 예정이었다.
대강당의 문이 열리자 학생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저마다 소속 반의 위치로 자리를 잡았고, 정규반 학생들은 앞줄을, 보충반과 열외반 학생들은 뒤쪽 구석을 차지했다.
이운소는 그 맨 뒤, 가장 어두운 자리에 앉았다.
주변에서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오늘 또 전출 발표한다던데."
"누구? 설마 폐인반에서?"
"에이, 설마."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이운소는 아무 말 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단상 위, 서은하가 자리에 섰다.
그녀의 옷차림은 여느 때와 같이 단정했지만, 표정에는 평소보다 미묘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몇 명의 학생들을 특수반으로 전출시키는 절차를 안내하겠다."
서은하가 단상에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었지만, 시선은 잠시 이운소 쪽을 향했다.
대강당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특수반 전출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전 학년을 통틀어 일 년에 한두 명, 그것도 극소수의 상위권 학생들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였다.
"특수반이라니, 이번엔 누구야?"
"뻔하지, 강도윤 아니겠어?"
강도윤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앉은 그의 자세에는 확신이 배어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
서은하의 손에 들린 명단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 떨림을 감추려는 듯 명단을 다시 접어 손에 쥐었다.
"이운소."
호명이 떨어졌다.
대강당 안, 수백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정적이 일었다.
그리고 곧, 그 정적을 비웃음이 채웠다.
"...하?"
"뭐야, 잘못 부른 거 아냐?"
"폐인이 뭐하러 여기 서 있냐."
누군가 낮게 중얼거렸다.
또 다른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픽 웃음을 터트렸다.
이운소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섰다.
등 뒤에서 킥킥거리는 소리, 손가락질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소리는 더 커졌다.
강도윤은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조롱과 함께, 이 상황이 흥미롭다는 듯한 여유가 담겨 있었다.
"저놈 저거, 서은하 교관이 무슨 마음으로 부른 건지."
"동정 아니겠어? 마지막으로 기회 한 번 더 주는 거지."
이운소는 그 모든 시선을 지나쳐 단상 앞, 술식판이 놓인 자리까지 걸어갔다.
그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서은하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형식적인 냉정함 뒤로, 미세한 기대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술식을 그려봐라. 기초 발현이라도 좋다."
이운소는 술식판 앞에 섰다.
어제와 같은 자리, 같은 상황.
하지만 그의 눈빛은 어제와 달랐다.
관자놀이가 다시 지끈거렸다.
어제와 같은 통증.
하지만 이번엔 그 통증 속에서, 무언가가 명확히 떠올랐다.
'가르쳐주지. 이 세상 어떤 술사도 완성하지 못한 것을.'
낯선 목소리, 그러나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십오 년간 그를 짓눌러온 낯선 기억들이 마침내 하나의 형태로 응축되었다.
'검을 들었다. 그리고 세상이 무릎을 꿇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순서를 되찾아갔다.
전장의 함성, 피 냄새,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배신.
화선대륙 10대 봉호무제, 그중 최강으로 불리던 파멸검제 고비양.
9성 제급의 술련사, 9천경의 무도 최강자.
그가 남긴 이름은 두려움과 경외로 동시에 불렸다.
그의 마지막 순간, 배신, 그리고 죽음.
그 모든 것이 이운소, 아니, 고비양의 기억으로서 완전히 되살아났다.
'물론. 네가 이렇게 될 줄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기억 저편에서 스쳤다.
낯익은 듯, 낯선 얼굴.
하지만 지금은 그 얼굴을 붙잡을 여유가 없었다.
"...이제야."
이운소가 낮게 중얼거렸다.
손끝이 술식판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느렸다.
마치 오래 쓰지 않은 손이 감각을 되찾아가는 것처럼.
하지만 곧 속도가 붙었다.
원, 삼각, 오각, 그리고 지금껏 이 학원 누구도 본 적 없는 복잡한 문양들이 겹겹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선과 선이 교차하고, 그 교차점마다 새로운 기하가 생겨났다.
그것은 36수법의 어떤 규칙에도 속하지 않았다.
'스스스스'
술식판 전체가 은은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뭐, 뭐야..."
주변 학생들이 숨을 죽였다.
방금까지 비웃던 얼굴들이 하나둘 굳어갔다.
서은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명단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건... 36수법이 아니잖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십수 년 술식을 가르쳐온 교관으로서, 눈앞의 문양을 해석하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어떤 기초 도형에서 시작됐는지조차 짚어낼 수 없었다.
"12식 신기법(十二式 神技法)."
이운소가 담담하게 말했다.
대강당 전체가 얼어붙었다.
12식 신기법은 전설이었다.
화선대륙 술련 역사상 단 한 명, 파멸검제 고비양이 개발했다고 알려진 최고급 술식 체계.
술련의 정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경지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고 전해지는 체계.
하지만 그는 이미 15년 전 죽었고, 그가 남긴 기록은 극히 일부만 전승됐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온전한 해석본이 아니라, 조각난 파편에 불과했다.
"12식... 신기법이라고?"
교관석 쪽에서 누군가 낮게 되물었다.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고 있었다.
"제일식, 만천화우(第一式, 滿天花雨)."
이운소의 손이 마지막 문양을 완성했다.
'번쩍!'
술식판에서 뻗어 나온 수백 개의 빛줄기가 대강당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곧이어 그것들이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잎 형태로 변해 강당 안을 채웠다.
빛의 꽃잎들은 바람도 없이 허공을 유영했다.
학생들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스치듯 지나가며 잦아들었다.
"...아름다워."
누군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그저 표면이었다.
서은하는 그 술식의 밀도와 정교함에 숨을 들이켰다.
'이건... 4상경계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술식이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가르쳐온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밀도였다.
학원의 어떤 교관도, 어떤 상급생도 이런 수준의 발현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 이운소. 너 어떻게..."
서은하가 겨우 말을 잇다가 멈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을 앞에 두고, 그녀의 논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운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다시 움직였다.
"제이식, 파산붕(第二式, 破山崩)."
이운소는 멈추지 않았다.
술식판에 새로운 문양이 새겨졌다.
직선과 곡선이 뒤섞이며 순식간에 육중한 형태를 그려냈다.
'콰앙!'
대강당 바닥 일부가 진동했다.
실제로 파괴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술식이 발산한 기운의 압력만으로도 근처에 있던 학생들이 뒷걸음질쳤다.
몇몇은 균형을 잃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야?"
한백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주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까지 이운소를 폐인이라 부르던 입들이 하나둘 다물어졌다.
강도윤의 얼굴에서 조소가 사라졌다.
대신 처음으로, 그의 눈에 경계심이 서렸다.
"...저놈이 폐인이라고?"
그는 팔짱을 풀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이운소는 3식, 4식을 거쳐 계속해서 술식을 그려나갔다.
각 술식은 정통 36수법의 원리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조합되어 있었다.
어떤 문양은 원형에서 시작해 사각으로, 다시 육각으로 변형됐고, 그 변형 과정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논리를 이루고 있었다.
서은하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그 원리의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36수법의 개량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체계다. 이런 걸... 열다섯 살짜리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운소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학원 교관으로서의 이성과, 눈앞의 존재에 대한 경외가 뒤섞였다.
대강당 곳곳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렸고, 누군가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멈춰라."
서은하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음성은 명령조였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이운소가 손을 내렸다.
술식판의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빛의 꽃잎들이 허공에서 하나둘 스러졌다.
바닥에 남은 진동의 흔적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대강당은 침묵에 잠겼다.
수백 명의 학생, 그리고 교관들까지, 모두가 방금 목격한 것을 믿지 못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비웃음도, 조롱도, 그 어떤 소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서은하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운소... 너, 대체 누구지?"
그 질문에, 이운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술식을 그려낸 그 손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십오 년 동안 자신을 짓눌러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답을 이 자리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강당 안 어딘가에서, 누군가 낮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정적 위로, 이운소의 시선이 서은하를 향했다.
그의 눈빛에는, 어제까지의 그 어떤 흔들림도 남아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