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으려 했는데, 마왕이었다

3화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천장의 나뭇결 무늬를 세다가,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었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화상도, 상처도. 굳은살 하나 없이 그냥 평범한 손이었다. '평범할 리가 없잖아.' 방금 화분 전체를 재로 만든 손이 평범할 리 없다. 화분도, 그 안의 흙도, 뿌리까지 전부 새까맣게 태워버린 손이 어떻게 평범한 손일 수가 있나. 손끝을 코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아봤다. 아무 냄새도 안 났다. 타는 냄새도, 이상한 냄새도. 그냥 비누 냄새. '그럼 대체 뭐였는데, 그건.' 몇 번이나 뒤척였다. 이불을 걷었다가 다시 덮었다가,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가. 두 해 동안 이 방에서 이렇게까지 잠을 설친 적이 없었다. 두 해 동안 이 방은 그냥 답답하고 지루한 공간이었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눈이 감겼다. 그리고 정말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곧바로 종소리가 울렸다. 이번엔 다급한 소리였다. 평소 아침을 알리던 종소리와는 리듬이 완전히 달랐다. 짧고 빠르게, 마치 두드리듯 울려 퍼졌다. 문 아래로 밀려들어오는 발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여러 명이 뛰는 소리였다. 바닥이 미세하게 울렸다. "침입자! 탑 삼층!" 밖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 목소리였다. 다급했다. '침입자? 여기에?' 두 해 동안 이 탑에 침입자가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이 탑 근처에 누가 얼씬거리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늘 똑같았다. 숲, 그리고 그 너머의 낮은 산등성이. 사람 그림자 하나 지나가는 걸 못 봤다. '근데 왜 하필 오늘.' 어제 그 일이 있고 바로 오늘. 우연이라고 하기엔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몸을 일으켜 앉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경첩이 뜯어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나무 파편이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 반쪽에 흉터가 있었다. 눈썹 위에서 시작해서 턱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흉터였다. 손에는 시커먼 단검을 들고 있었다. 칼날에서 뭔가 끈적한 기운이 스며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남자가 낮게 웃었다. "오랫동안 잘 숨어 있었군, 마왕." 마왕. 그 단어가 또, 나를 향해서. '뭔 소리야, 사람 잘못 봤어요.' 나는 뒷걸음질쳤다. 등이 침대 프레임에 걸렸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저기요, 진짜로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목소리가 떨렸다. 존댓말이 나온 게 나조차 웃겼다. 이런 상황에서도 존댓말이 나오는구나. "저 그냥 여기 갇혀 있던 사람인데요. 마왕이 뭔데요, 저는." 남자는 대꾸도 없이 단검을 들고 곧장 다가왔다. 발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서두르지도 않았다. 이미 승부가 정해졌다고 믿는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변명은 됐다." 남자의 눈빛이 차가웠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네가 알까." 칼끝이 목을 향했다.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도망갈 곳도 없고, 소리를 지를 새도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 살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냥 손이 앞으로 나갔을 뿐이다. 손끝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확 터져 나왔다. 퍼억. 공기가 일순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의 몸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물들었다. 로브도, 피부도, 눈동자도 전부 하나의 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재가 됐다. 푸욱. 소리도 없이.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는 재만 남았다. 옷도, 단검도, 전부. 바닥에 흩날리는 회색 가루뿐이었다. 사람 하나가 사라진 자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손끝에서 아직도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촛불이 꺼진 뒤 남는 연기 같았다.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다시 펴봤다. 기운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사라졌다. '이게 뭔데.' 무섭다는 생각도 늦게 들었다. 방금 사람을 죽였다는 자각조차 늦게 왔다. 그때, 방 안의 낡은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눈동자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평소 내 눈 색이 아니었다. 등 뒤로 뭔가 그림자처럼 일렁이는 게 보였다. 날개인지, 그냥 어둠인지 구분이 안 됐다. 형체가 계속 흔들리면서 모양을 바꿨다. '이게... 나야?' 거울 속의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울 속의 나도 똑같이 손을 뻗었다. 당연한 반응인데도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뭔가가 밀려들어왔다. 기억인지, 지식인지 모를 것들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이 한 번에 열리는 것처럼,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오래전 이 세계를 뒤흔든 존재. 세계의 이치 밖에 있는 자. 죽어도 죽지 않는 자. 성녀가 처단해야 할 최후의 적. 마왕. 그 이름이, 지금 이 몸의 진짜 이름이라는 걸, 나는 그 순간 아주 확실하게 알아버렸다. 부정하고 싶은데 몸이 먼저 받아들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계속 "그래, 맞아, 네가 맞아"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에도 힘이 빠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두 해 전, 아무 이유도 없이 이 탑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아주 확실한 이유가. 나는 봉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로. 그동안 아무도 나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던 것도, 두 해 동안 이 탑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전부 이해가 됐다. 감시가 아니라 봉인이었으니까. 아무도 이 존재가 눈을 뜨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밖에서 병사들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더 많은 발소리였다. 문이 다시 열리고, 이번엔 여러 명이었다. 창을 든 병사들이 방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방 안에 흩어진 재와 나를 번갈아 보며 창끝을 겨눴다. 아무도 먼저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강서은. 방금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 같았다. 숨이 가빠서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흐트러진 채 얼굴에 붙어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방 안을 둘러보던 강서은의 눈이, 바닥에 흩어진 재와, 검붉게 물든 내 눈동자에 딱 멈췄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병사들의 창끝도, 강서은의 눈동자도, 다 그대로 멈춰버린 것 같았다. "유리야." 강서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너... 지금..."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강서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다가와서 나를 확인하려던 손이었는지, 아니면 물러서려던 손이었는지 나조차 구분이 안 됐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야, 나 그런 거 아니야.'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방금 사람을 재로 만든 손을 뒤로 숨기고 싶었지만 그것도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냥, 그 순간, 이 세계에서 나의 자리가 어디였는지, 지금 이 순간 명확하게 깨달아버렸을 뿐이었다. 성녀와 마왕. 둘이 마주 서 있는 이 방이,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좁은 방처럼 느껴졌다. 병사들의 창끝이 나를 향해 조금씩 조여왔고, 강서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먼저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