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예언서를 서고에 도로 꽂아 넣으면서, 나는 이미 결심을 하고 있었다.
책장에 손을 대고 있는데, 손끝이 먼지투성이였다.
이 세계는 마왕의 서고까지도 관리가 개판이구나.
'지금 그게 중요해?'
아니, 안 중요하다.
'스스로 소멸을 택하지 않는 이상.'
그 문장이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다른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
강서은이 내 손에 칼을 꽂는 그림보다는, 내가 먼저 사라지는 그림이 훨씬 나았다.
적어도 강서은의 손을 더럽히지는 않을 테니까.
성녀의 검이 마왕의 심장을 뚫는 순간을 상상해봤다.
그 손에 남을 핏자국을, 그 눈에 남을 표정을.
강서은은 평생 그 장면을 안고 살아야 할 거다.
나는 그런 짐을 그 사람 어깨에 얹고 싶지 않았다.
'남주는 게 뭐가 있어야 남기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없애주는 게 맞았다.
서고 문을 닫고 나오면서 사제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뒷길로 돌았다.
관사 사람들은 이미 잠들었는지 조용했다.
발소리를 죽이는 나 자신이 웃겼다.
어차피 몇 시간 뒤에는 아무 소리도 안 낼 텐데, 지금 와서 조심할 게 뭐가 있나.
그날 밤, 나는 관사 뒤편 강가로 나갔다.
달빛이 물 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멋진 배경이네. 죽기에 딱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지도 않는 감상이었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평소엔 신경도 안 쓰던 소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또렷하게 귀에 박히는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다 이렇게 들리나.'
감성적인 척은.
허리에 차고 있던, 부엌에서 몰래 챙긴 작은 칼을 꺼냈다.
손이 떨렸다.
마른침이 자꾸 넘어갔다.
칼날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게 어이없었다.
사람이 죽음 앞에서도 미적 감상이 가능하다는 게, 참.
'괜찮아. 어차피 나는 여기 원래 없어야 했던 사람이야.'
원래 세계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내 자리는 애매했다.
마왕이라는 이름조차, 내가 원해서 얻은 게 아니었다.
누가 물어보고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어느 날 눈뜨니 씌워져 있던 딱지 같은 거였다.
그냥 사라져도, 크게 아쉬울 사람이 있을까.
원래 세계 쪽엔 이미 내 자리가 없었을 거고.
이쪽 세계엔 애초에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없었고.
강서은 정도, 겨우 강서은 정도.
그 정도면, 감당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오만한 생각이지.'
누가 누구를 감당한다는 표현을 쓸 자격이 나한테 있나.
그래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안 그러면 손이 안 움직일 것 같았으니까.
칼끝을 심장 쪽으로 가져갔다.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숨을 짧게 내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이러니하네. 멈추려고 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뛰네.'
몸은 살고 싶어 하는데 머리는 자꾸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미안해, 서은아.'
그 한마디를 속으로 되뇌고, 나는 칼을 힘껏 밀어넣었다.
통증은 확실했다. 뜨겁고, 아프고, 숨이 턱 막혔다.
'아, 진짜 아프구나.'
의외로 이런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우스웠다.
영화에서는 다들 조용히, 편안하게 눈을 감던데.
현실은 그냥 아프기만 했다.
피가 옷을 붉게 적셨다.
따뜻한 게 옷 안으로 퍼지는 감각이 이상하게 생생했다.
의식이 아득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상처 주변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마치 상처를 감싸듯이.
칼날이 밀려나듯 스스로 빠져나왔다.
텅.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상처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아물었다.
피가 멎었고, 살이 다시 붙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만 붉게 젖어 있었다.
'······뭐야.'
나는 멍하니 내 가슴을 내려다봤다.
분명히, 확실히, 칼을 심장 깊이 밀어넣었는데.
숨이 계속 붙어 있었다.
죽지 않았다.
손으로 가슴을 몇 번이나 눌러봤다.
아무 통증도 없었다.
아까 그 뜨거운 감각이 다 거짓말 같았다.
'이게 뭔 개짓거리야.'
욕이 절로 나왔다.
스스로한테 화가 나는 건지, 이 몸뚱이한테 화가 나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죽지도 못하네, 진짜.'
예언서의 문장이 그제야 뒤통수를 후려쳤다.
스스로 소멸을 택하지 않는 이상.
그 말은, 그냥 죽으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칼로 찔러도, 물에 뛰어들어도, 이 몸은 세계의 법칙 밖에 있어서 그런 방식으로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진짜로 사라질 수 있다는 건지, 예언서는 거기까진 알려주지 않았다.
'불친절한 책이네.'
사람 목숨줄 갖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강물에 몸을 던지는 것도 방법이 될까 잠깐 고민했다.
칼로도 안 죽었으니 물에 빠져도 똑같을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
"유리야!"
강서은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뛰어오고 있었다.
관사에서 내가 나가는 걸 본 사제가 이상하게 여겨 알렸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었다.
'하필 오늘 그 사제가 눈이 밝았나.'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지, 좋았다고 해야 할지.
강서은은 피로 젖은 내 옷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듯 주저앉아 내 몸을 붙잡았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목소리가 떨렸다.
손이 내 가슴을 더듬었다. 상처는 없었다. 옷만 피범벅이었다.
그 손끝이 옷 위를 몇 번이나 훑고 지나갔다. 상처를 못 찾겠으니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멀쩡해. 봐, 다 나았어."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태연할 상황은 아니지만.'
옷은 이미 못 입을 지경으로 젖었는데 태연한 척하는 게 우습긴 했다.
강서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 지금 뭐 하려고 한 거야."
조용하지만 무서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실려 있는 게 화인지 두려움인지 구분이 안 됐다.
아마 둘 다였겠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강서은이 내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서 아플 지경이었다.
"너 나 때문에 죽으려고 한 거지."
확신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부정해봤자 이미 다 들킨 마당에 무슨 의미가 있나.
"네가 나를 죽여야 하는 날이 오면."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게 낮게 나왔다.
"그 전에 내가 먼저 없어지는 게, 너한테는 나을 것 같아서."
말을 뱉고 나니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숨겨왔던 걸 다 들켜버린 사람의 후련함이라는 게 있다면 그런 거였다.
강서은이 나를 확 끌어당겨 껴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팔에 감긴 힘이 그대로 등뼈에 전해졌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다시는, 절대로."
나는 그 어깨너머로 강물이 여전히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걸 봤다.
아까는 그렇게 아름답던 게, 지금은 그냥 물일 뿐이었다.
'아까 그 감상은 뭐였을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나는 그 품 안에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죽지 못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등에 닿는 강서은의 심장 소리가 내 것보다 더 빨리 뛰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안심할 틈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신전에서 급한 전령이 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부터 심상치 않았다.
관사 전체가 부산스러워졌고, 사제들이 복도를 급하게 오가는 발소리가 벽 너머로 들렸다.
강서은을 찾는 전언이었다.
"성녀님, 대신전에서 소환 명령입니다. 오늘 안으로 출석하셔야 합니다."
전령의 얼굴은 새파랗게 굳어 있었다.
급하게 달려온 듯 숨도 제대로 못 고른 채였다.
강서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유가 뭔데."
전령은 잠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 잠깐의 침묵이 방 안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어젯밤, 탑에서 침입자가 마왕의 힘에 소멸됐다는 보고가 이미 대신전에 올라갔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침입자? 소멸?'
어젯밤 내가 강가에 있었던 그 시간에, 탑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누가, 무엇이, 어떻게 소멸됐다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게 더 불안했다.
강서은이 나를 돌아봤다.
그 눈빛에는 방금까지 나를 붙잡고 울던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동시에 이미 성녀로서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그 눈빛에서, 우리가 이미 정해진 시간표 위에 올라섰다는 걸 직감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데, 이젠 이런 것까지.'
누군가는 짜놓은 판 위에서, 나와 강서은은 아직 그 규칙조차 모르는 채로 말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