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떠맡은 보모, 신화가 되다

4화

숙소로 돌아오니 아이들은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화로운 오후였다. 이한이 물놀이 흉내를 내며 팔을 휘젓고, 소망이 그걸 따라 뛰어다니며 꺄르륵 웃고, 서리는 나무 그늘에 앉아 풀잎을 뜯어 손톱만 하게 찢고 있었다. 평화롭다는 건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 온 뒤로 내가 배운 게 그거였다. 나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마당 한쪽 계단에 걸터앉았다. 어제와 오늘 알아낸 사실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됐다. 사흘째, 어머니가 말한 그 사흘째. 정확히 뭐가 터진다는 건지는 안 알려줬다. 늘 그런 식이었다. 예언은 던져주고 해석은 알아서 하라는 식. 무슨 불친절한 퀘스트 창도 아니고. 그래도 뭐든 대처는 해야 했다. 최소한 아이들을 시야 밖으로 놓치지 말자는 게 내가 세운 유일한 대책이었다. 대책이라기엔 좀 초라했지만, 지금 내 손에 쥔 카드가 그게 다였다. "언니, 나 이거 봐봐." 이한이 뭔가를 주워 와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나뭇가지였다. 그냥 나뭇가지. "멋지다." "진짜지?" 건성으로 대답해도 아이는 만족한 듯 다시 뛰어갔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곧 그 다행이 오래가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정확히 삼십 분쯤 뒤에 현실이 됐다. "언니, 하람이 이상해." 다온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면서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뻔했다. 넘어질 뻔한 몸을 겨우 세우고 하람 쪽으로 뛰었다. 하람은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눈동자가 이상하게 흐려져 있었다. 마치 초점이 몸 안쪽 어딘가로 빠져버린 것 같은 눈이었다. 그리고 그 몸 주변으로, 마나 밀도가 순식간에 치솟고 있었다. 쩌엉. 주변 공기가 팽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소리였는데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거 좋은 소리 아니다. 하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형태를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흙바닥이 움푹 파이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나는 그 소리들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렸다. 저게 사람 몸에 맞았을 때 어느 정도 피해가 날지.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들 뒤로 물러나!" 나는 소리치며 아이들을 밀어냈다. 다행히 아이들은 순순히 물러났지만, 하람 본인은 눈을 뜬 채로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마치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하람, 내 말 들려?" 대답이 없었다. 대신 하람 주변의 마나가 더욱 응축되면서, 이번엔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얼음 결정이 허공에서 자라나 하람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마치 얼음으로 만든 회전목마 같았는데, 그 회전목마 한가운데 앉은 게 겨우 예닐곱 살짜리 아이라는 게 문제였다. 망했다. 지금까지 내가 다뤄본 마나 양의 몇십 배는 되는 밀도였다. 이걸 어떻게 막아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마나 이론 독학 몇 개월 한 걸로 이런 규모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없었고. "언니! 하람이 무서워!" 소망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얼음 결정이 조금씩 커지면서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마당의 풀들이 서리에 덮이고, 내 손끝이 시려왔다. 여름옷을 입고 나온 게 후회됐다. 지금 이 순간에 그런 후회가 드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생각해야 했다. 이론적으로, 폭주하는 마나를 막는 방법이라면. 내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독학으로 쌓아온 마나 이론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마나는 흐름이다. 흐름을 억지로 끊으려 하면 반작용이 커진다. 물길을 막으면 물이 넘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오히려 흐름을 유도해서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내는 게 맞았다. 이론은 쉬웠다. 문제는 항상 실전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밀도를 내 몸으로 받아낼 수 있을까. 이론서 몇 권 읽었다고 이걸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가 우스웠다. "이슬, 뭐라도 해봐요!" 서리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평소엔 나보다 침착한 애가 저렇게 소리치는 걸 보니 상황이 진짜 심각하다는 게 실감 났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하람 쪽으로 다가갔다. 발밑에서 서리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방금까지 여름이었던 마당이 순식간에 초겨울처럼 변해 있었다. "다들 여기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얼음 결정이 회전하는 원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손끝에서 냉기가 올라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하람의 마나가 내 손에 스치는 순간, 예상보다 훨씬 큰 충격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퍼억. 뭔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 전에 겨우 발로 버텨서 넘어지진 않았다. 팔뚝이 얼얼했다. 이거 맞고 안 부러진 게 다행인 건지. 이대로는 안 됐다. 힘으로 막으려다간 나까지 같이 날아갈 판이었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시도해본 적 없는 방법을 쓸 여유가 있을까. 실험은 보통 실패할 각오하고 하는 거였는데, 지금은 실패하면 그대로 아이 하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려는 걸 억지로 붙잡았다. 지금 필요한 건 패닉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이슬!" 그 순간, 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왔는지 어머니가 숙소 입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평소 같으면 그 태연함이 얄미웠을 텐데, 지금은 그게 더 무서웠다. "어머니, 도와주세요!" "안 된다. 이건 네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판국에 예의 차릴 정신이 없었다. "이 아이의 마나는, 지금 이 세계에서 너만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종류다. 나는 손도 못 대."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평소엔 감정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목소리에 균열이 생겼다는 게, 상황을 더 실감 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게, 지금 이 순간 가장 무서운 사실이었다. 이 세계에서, 오직 나만. 거창한 특별함이 아니라, 도망칠 구석이 없다는 소리였다. 뒤로 미룰 사람도, 대신 나서줄 사람도 없다는 소리. 하람의 몸에서 얼음 결정이 더욱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몇 초만 더 지나면 그게 무슨 형태로 폭발할지 예측조차 안 됐다. 폭죽처럼 사방으로 튈지, 아니면 안으로 붕괴할지. 둘 다 상상하기 싫었다. 숨이 턱 막혔다.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마나 이론 몇 권 뗀 걸로 어떻게 이걸 막나. 애초에 이 세계에 떨어진 것부터가 억지였는데, 이제는 그 억지 위에 또 다른 억지를 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감당할 사람이 나 말고 없다면. 선택지가 하나뿐이면 그건 선택이 아니라 그냥 해야 하는 일이었다. 억울해할 시간도 없었다.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이미 얼어붙어 감각이 둔했지만, 상관없었다. 감각이 있으면 오히려 더 겁이 났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하람의 눈동자가 완전히 하얗게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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