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손을 뻗은 채로 나는 얼어붙었다. 하람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힌 순간, 주변의 얼음 결정들이 일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쩌엉, 쩌엉.
마당 곳곳에 서 있던 서리 기둥들이 동시에 울었다. 이건 폭주의 다음 단계였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신기한 마술 같았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것들이 한 번에 무너지면 마당은 물론 숙소 전체가 성한 곳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나도 그 안에 포함될 것 같았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돌렸다. 지금까지 독학으로 쌓아온 이론 중에서, 이런 규모의 마나를 다룰 만한 방법이 딱 하나 떠올랐다. 흐름을 억지로 막지 않고, 내 몸을 통로로 써서 흘려보내는 방식. 책에서는 그냥 각주 한 줄로 처리된 이론이었다. 시도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시도해본 사람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미친 짓이지만 지금 안 하면 더 미친 일이 벌어지겠지."
혼잣말을 뱉으며 나는 하람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손바닥이 아이의 얇은 옷 위로 닿는 순간, 예상보다 훨씬 큰 마나의 양이 밀려들었다. 숨이 턱 막혔다. 코에서 뭔가 뜨끈한 게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확인할 겨를도 없이 코피라는 걸 알았다. 이건 익숙한 감각이었다. 위험 신호를 몸이 알아서 알려주는 셈이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애매했다.
"버텨, 버텨야 해."
나는 이를 악물고 마나의 흐름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온몸이 얼어붙는 감각과 동시에 뭔가 타는 듯한 열기가 뒤섞여 올라왔다. 상반된 감각이 동시에 몸을 훑고 지나가는 게, 마치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냉탕과 열탕에 동시에 들어가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그 와중에도 그런 한심한 생각을 하는 내가 어이없었다.
"이슬!"
어머니가 소리쳤지만 나는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가 다시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하람에게서 넘어오는 마나를 그대로 받았다가는 내가 먼저 터질 판이었다. 받은 걸 다시 흘려보낼 곳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디로? 이 마당에 마나를 흡수할 만한 게 뭐가 있지?
시야 끝에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마당 구석에 서 있던,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나무였다. 그 순간만큼은 그게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존재로 보였다.
나는 눈을 감고,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을 시도했다. 마나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걸 내 손끝을 통해 근처의 나무로 흘려보내는 것. 이론상으로는 마나가 자연물을 매개로 분산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해본 적은 없었다. 지금 실패하면 그냥 이론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끝날 판이었다.
손끝에서 은빛 입자들이 뿜어져 나와 옆의 나무로 흘러들어갔다. 나무껍질이 미세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파직, 파직. 마치 나무가 아프다고 소리 내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됐다. 이 방법이 통했다.
하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마나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얼음 결정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며 물방울로 떨어졌다. 똑, 똑, 똑.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방금까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냥 조용한 낙숫물 소리만 남았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은 게 아니라 그냥 다리가 접혔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하람아, 정신 들어?"
하람의 눈동자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잠시 멍하게 나를 보던 하람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 무서웠어···"
"괜찮아, 이제 괜찮아."
나는 하람을 끌어안았다. 몸은 여전히 시리고 코피는 멎지 않았지만, 최소한 아이는 안전했다. 그거면 됐다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중에 병원비 걱정은 나중에 하고.
어머니가 그제야 달려와 상황을 살폈다. 손끝이 여전히 떨렸다.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멀찍이 서 있었다. 다온이 서리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이한은 소망을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저것도 나름의 형제애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한 거냐."
어머니가 묻자 나는 소매로 코피를 닦으며 대답했다. 소매가 이미 붉게 젖어 있었다. 새 옷이었는데.
"마나를 흘려보냈어요. 나무로."
"그게 가능한 거였어?"
"저도 방금 처음 해봤어요."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나무를 살폈다. 껍질이 갈라진 그 나무는, 이상하게도 갈라진 자리마다 은은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마나가 그 안에 흡수되어 남아 있는 흔적 같았다. 어머니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걸 보고, 나는 뭔가 잘못됐나 싶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슬, 지금 이 순간 확실히 알아야 할 게 있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등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를 낮췄다는 건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아야 할 이야기라는 뜻이었고, 그런 이야기는 대체로 나한테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이 아이들은 다 이런 위험을 품고 있다. 하람만이 아니라, 일곱 다 마찬가지다."
등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방금 겪은 일이 일곱 배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계산이 되는 순간 손끝이 다시 시려왔다.
"그럼 다른 애들도 언제든 이런 일이···"
"그래. 그리고 그걸 막을 수 있는 게, 지금 이 세계에서 너 하나뿐이다."
나는 반박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방금 겪은 일로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이런 걸 일곱 번, 아니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하는 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진이 빠졌다. 최저시급 계산하면서 살던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목숨값을 계산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러려고 애들을 저한테 맡긴 거예요?"
"처음부터 정확히 이걸 노리진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
"그럼 미리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말했으면 네가 도망갔을 테니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알았다면 결정석 열 개를 준다 해도 도망쳤을 거다. 아니, 스무 개를 준다고 해도 도망쳤을 거다. 이건 돈으로 해결될 위험 수당이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어머니는 이번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서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읽을 수 있었다.
"이 아이들 곁에 있어야 한다. 그냥 며칠이 아니라, 이 힘을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
"그게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어머니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마치 몇 년이라는 시간이 별것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는데, 정작 그 몇 년을 살아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로 하람을 안고, 다른 여섯 아이들을 둘러봤다. 다온, 이한, 서리, 노을, 별하, 소망. 다들 아직도 겁먹은 얼굴이었지만, 그 안에 잠재된 힘이 방금 목격한 것과 비슷한 규모라면. 저 조그만 몸들 안에 방금 본 것 같은 폭풍이 각각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코피가 다시 날 것 같았다.
이건 보모 알바가 아니었다. 이건 시작이었다.
"이슬 언니."
다온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옷자락을 잡았다. 작은 손이 옷깃을 붙잡는 힘이 생각보다 셌다.
"우리 다 그런 거예요? 하람이처럼?"
대답할 말을 고르는 사이, 나무에 남은 은은한 빛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마나가 흡수된 자리, 그 흔적이 마치 어떤 문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갈라진 흔적이려니 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선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우연히 갈라진 나무껍질이 그런 규칙성을 가질 리는 없었다.
분명 방금까지는 그냥 갈라진 흔적일 뿐이었는데.
나는 그 빛무늬를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등줄기를 타고 다시 서늘한 감각이 흘렀다.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