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에도 나는 물동이를 대신 들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동이 트기 전에 눈이 떠지는 게 이상했다. 전생에는 알람을 세 개씩 맞춰놓고도 늦잠을 자던 몸이었는데, 이 몸은 새벽 공기 냄새만 맡아도 저절로 일어났다. 마루에 나가면 하은이 벌써 물동이 두 개를 들고 마당 어귀에 서 있었다. 나는 그중 무거운 쪽을 낚아채듯 들었다. 하은은 처음 며칠은 손을 뻗어 뺏으려는 시늉을 했지만, 이내 그것도 그만뒀다.
개울까지는 걸어서 십 분 남짓. 자갈길이라 발밑이 미끄러웠다. 물을 받아 돌아오는 길에는 물동이가 배는 더 무거워졌다. 어깨가 뻐근했지만 참을 만했다. 전생에서 헬스장 좀 다녀본 몸이 아니라는 게 아쉬웠지만, 어쨌든 견딜 만했다.
열흘쯤 지나자 하은은 아무 말 없이 물동이를 넘겨주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대화는 많지 않았다. 물동이가 무겁다든가, 개울물이 오늘은 차다든가 하는 사소한 말들뿐이었다.
"오늘은 손이 좀 시리네." 하은이 손끝을 물에 담갔다가 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받아올게."
"됐어. 이 정도는 나도 해."
그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붙어 있었다. 나는 굳이 더 우기지 않았다. 그래도 그게 이어지는 게 이상하게 편했다. 말수가 적은 사람 옆에 있는 건 생각보다 덜 피곤했다. 전생에서는 침묵이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채워 넣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 마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침묵도 대화의 일종이었다.
도영의 괴롭힘은 여전했다. 오히려 내가 하은 옆에 자주 있는 걸 눈치채고는 나까지 걸고넘어지기 시작했다.
"애매한 기프트한테 뭘 기대해서 붙어 다니는 거야." 도영이 어느 날 지나가듯 말했다. 밭두렁을 지나며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고 갔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그 애 눈에는 내가 그냥 특징 없는 조연이었고, 나는 그게 편했다. 조연은 주목받지 않는다. 주목받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 그게 전생에서 배운 몇 안 되는 생존 법칙 중 하나였다.
다만 도영이 하은을 볼 때의 눈빛은 마음에 걸렸다. 순수한 괴롭힘이 아니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눈빛. 자기보다 약한 걸 계속 확인해야 안심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도영이 그런 부류였다.
그날 저녁, 하은이 개울가에서 혼자 돌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물살에 돌 부딪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퐁. 퐁.
"오늘도 그랬어?" 내가 물었다.
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돌 하나를 물속에 세게 던졌다. 물방울이 튀어서 하은의 손등에 닿았다.
"아무렇지도 않아." 목소리가 낮고 딱딱했다. "익숙해졌으니까."
익숙해졌다는 말이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전생에서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그 말은 대체로 사실이 아니었다. 익숙해졌다는 건 대체로 포기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나는 뭐라고 말을 얹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옆에 앉아 있었다. 하은이 돌을 몇 개 더 던졌다. 던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가, 마지막 돌은 손에서 놓지 못하고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하은이 먼저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은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어깨가 좁았다. 나이보다 작은 체구였다. 저 몸으로 매일 이 개울을 오가고, 매일 도영의 시비를 받아내고 있었다. 익숙해졌다는 말이 자꾸 귀에 걸렸다.
그 밤, 시스템 창이 떴다.
[대상: 정하은. 신뢰 관계 형성 확인. 스킬 부여 가능]
나는 침대에 앉아 그 문장을 오래 들여다봤다. 신뢰 관계라는 게 이 정도로 형성되는 거였구나. 물동이 몇 번 들어준 것과 몇 마디 대화가 그 조건을 채운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조건이 헐렁했다. 아니면 하은이 원래 사람을 잘 믿는 성격인 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시스템 창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스킬 부여 가능. 그 밑에 아무 설명도 없었다. 어떤 스킬을 줄 수 있는지, 몇 개까지 가능한지, 부작용이 있는지. 아무것도. 전생의 게임이라면 튜토리얼 창이 열 개는 떴을 텐데, 이 시스템은 필요한 말만 하고 나머지는 전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불친절한 시스템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하은을 부르지 않고 그냥 옆에서 함께 걸었다. 물동이는 이미 내 손에 있었다.
"하은아."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혹시, 마음이 좀 편해지는 방법이 있으면 배워볼래?"
하은이 걸음을 멈췄다. 나를 쳐다봤다. 의심 반, 호기심 반이 섞인 눈이었다.
"그런 게 있어?"
"있어." 나는 짧게 답했다.
"뭔데?"
"일단 해봐야 알아."
하은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믿음이 반, 경계가 반이었다. 그래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게 이 시점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었다.
그날 오후, 예배당 뒤편 계단에 하은과 나란히 앉았다. 계단은 볕을 받아 따뜻했고, 나무 냄새와 흙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예배당 안에서 누군가 찬송가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손을 뻗어 하은의 손등에 살짝 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게 발동될지, 어떻게 발동되는지 나도 확신이 없었다. 전생에서 이런 걸 배운 적이 없었다. 손등에 손을 올리고 스킬을 부여한다니, 어디 사이비 종교 체험장 같은 발상이었지만 지금은 이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눈 감아봐."
하은이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속으로 그 스킬의 이름을 떠올렸다. 정신통일.
[스킬 부여: 정신통일 — 대상: 정하은]
[결과: 대상의 자질과 상황에 따라 효과가 조정됩니다]
그 문장이 뜨는 순간, 하은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눈을 감은 채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손등이 내 손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렸다가, 곧 잠잠해졌다.
"...뭐야, 이거." 눈을 뜬 하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머릿속이... 조용해졌어."
나도 몰랐다. 정신통일이라는 스킬이 정확히 어떤 효과를 내는지 시스템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다만 하은의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눈빛이 더 단단해 보였다. 어제까지는 눈동자가 자주 흔들렸는데, 지금은 초점이 또렷했다.
"이게 뭔지 물어봐도 돼?" 하은이 물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내가 가진 능력 중 하나야. 남한테 나눠줄 수 있는 거."
"애매한 기프트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보이는 게 편해서."
하은은 한동안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는데, 하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밀로 해줄게." 짧은 말이었다. "대신, 다음에 또 뭐 있으면 알려줘."
"약속?"
"약속." 하은이 처음으로 웃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게 우리 둘 사이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 나는 능력을 조심스럽게 쓰고, 하은은 그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단순한 거래였지만, 그때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약속처럼 느껴졌다. 전생에서 계약서 몇 장을 써본 경험으로 말하자면, 구두 약속이 제일 위험하다. 근데 그 순간에는 그 위험함조차 나쁘지 않았다.
그 뒤로 며칠 동안 하은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도영이 시비를 걸어도 예전처럼 위축되지 않았다.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걸음걸이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어깨를 웅크리던 버릇이 줄었다. 도영도 그걸 눈치챘는지 한동안 시비를 줄였다. 이상한 애 취급을 받는 게 싫었을 것이다. 괴롭히는 재미는 상대가 흔들려야 나오는 법인데, 하은이 흔들리지 않으니 도영도 김이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 며칠 동안 마음이 조금 놓였다. 개울가에서 물을 받으며 하은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무슨 대단한 성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애매한 기프트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다니. 전생에 가졌던 능력 중에 이만큼 뿌듯한 게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도영이 다른 아이 셋을 데리고 하은을 둘러쌌다. 개울가 다리 위였다. 나는 마침 근처 밭에서 아버지 심부름을 하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씨앗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걷던 중이었다.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도영의 목소리가 다리 건너까지 들렸다. "애매한 애랑 붙어 다니더니 뭐 배운 거 있냐?"
나는 손에 든 씨앗 자루를 내려놓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발이 빨라졌다. 자루 안에서 씨앗들이 흔들리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리 위에서 하은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서 있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신통일 스킬이 감정을 완전히 없애주는 건 아니었다. 그냥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정도였다. 두려움 자체를 지우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잡아먹히지 않게 하는 거였다. 그 차이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뭔데." 내가 다가가며 짧게 말했다.
도영이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어, 애매한 놈도 왔네."
"물러나." 나는 짧게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예상보다 날카롭게 나왔다.
도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라고?"
순간 공기가 팽팽해졌다. 다른 아이들도 눈치를 보며 물러날 기색을 살폈다. 다리 아래 개울물 흐르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콸콸.
나는 도영과 눈을 맞춘 채 물러서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겉으로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전생의 나는 이런 상황에서 늘 도망쳤다. 몸싸움도, 눈싸움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은 이상하게도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옆에 하은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 몸에 뭔가 다른 기질이 섞여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러다 진짜 싸움 나겠다." 아이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다행히 그때 멀리서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밭에서 나온 마을 사람이 우리 쪽을 보고 소리쳤다.
"거기 뭐 하는 거냐!"
도영은 혀를 차며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사라지기 전에 나를 한 번 더 흘겨봤다.
"두고 보자."
그 말이 남았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이 조용한 회피가 오래 가지 않겠다는 걸 직감했다. 도영 같은 애들은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할 때는 조용하지만, 밀렸다고 느끼면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되갚는다. 전생에서 회사 생활을 하며 배운 몇 가지 인간관계 법칙 중 하나였다. 나이는 어려도 사람 사는 이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은은 다리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다가가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하은이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손끝의 떨림이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게 보였다. "근데... 오늘 네가 좀 무서웠어."
나는 그 말에 뭐라 답할지 몰라서 그냥 침묵했다. 무서웠다는 게 나쁜 뜻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봤다가 원치 않는 답이 나올까 봐 그만뒀다.
우리는 한동안 다리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개울물 소리만 계속됐다. 하은이 먼저 발을 뗐다.
"물동이 가지러 가야 해."
"내가 들게."
"오늘은 됐어." 하은이 짧게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혼자 들 수 있어."
그 말이 왜인지 안심이 됐다. 무서웠다는 말과 혼자 할 수 있다는 말이 같은 사람 입에서 나온 게 이상하게 앞뒤가 맞았다. 사람은 그렇게 여러 감정을 한꺼번에 가질 수 있는 존재였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이 능력이 단순한 비밀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숨긴다고 숨겨질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도영의 눈에 나는 이상한 놈으로 찍혀버렸고, 그 시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애매한 기프트라는 가림막도 이제 예전만큼 든든하지 않았다. 도영은 뭔가를 감지했고, 감지한 이상 파고들 것이었다.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보며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었다. 하은의 손끝 떨림, 도영의 비웃음, 그리고 콸콸 흐르던 개울물 소리. 전생에서 시나리오 작가처럼 상황을 복기하는 버릇이 여기서도 남아 있었다. 오늘의 사건을 정리해보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반반이었다. 하은과의 신뢰는 깊어졌지만, 도영과의 거리는 더 벌어졌다. 좋은 거래였는지 나쁜 거래였는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시스템 창이 다시 떴다.
[알림: 신뢰 관계가 확장되었습니다. 새로운 대상이 감지됩니다]
그 문장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대상이라니. 도영은 아니겠지,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만약 그렇다면 이 마을에서 가장 골치 아픈 신뢰 관계가 될 게 뻔했다.
창을 몇 번 더 눌러봤지만, 시스템은 더 이상 아무 정보도 내놓지 않았다. 이름도, 조건도, 아무것도. 그저 감지되었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았다.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