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황무지 개척 시스템

1화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월세가 밀렸나. 아니, 그럴 리가. 나는 애초에 집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관 하나 겨우 들어갈 크기의 상자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있었다. 방금까지. 서울 변두리 4평짜리 고시원, 창문도 없는 그 관짝만 한 방에서 '은하개척단' 시즌패스 DLC를 클릭하고 있었는데. 할부 3개월로 긁었다. 이번 달 카드값 계산은 나중에 하기로 했었다. 어차피 나중에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사용자님,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그 알림을 마지막으로 본 기억이 난다. 결제 완료 팝업 밑에 조그맣게 떠 있던 "환불 불가" 문구까지 똑똑히 기억난다. 사람이 죽기 직전엔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던데, 나는 그 파노라마 자리에 결제창을 걸어놓고 죽은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은— 촤아아아아. 바람 소리가 대신 알림을 채웠다. 눈앞엔 붉은 흙과 잿빛 바위가 지평선까지 이어진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고시원 옆방 벽 두께가 종이짝만 해서 옆 사람 기침 소리까지 다 들리던 삶을 살다가, 이렇게 시야가 뻥 뚫린 곳에 던져지니 오히려 어지러웠다. 개방감에 적응이 안 되는 인생이라니 이것도 서글픈 일이다. 하늘은 이상하게 낮았고, 태양은 두 개였다. 두 개? 뭐지, 이거 듀얼 모니터야? 왼쪽 태양엔 시세 창 띄우고 오른쪽 태양엔 유튜브 틀어놓는 그런 구성인가.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몸은 이상하게 가벼웠고, 관절 여기저기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서른 줄에 들어서면서 무릎에서 나던 그 익숙한 신음이 아니었다. 계단 두 층만 올라가도 헐떡이던 그 폐도 아니었다. 오히려 스무 살 때보다, 아니 그보다 더 어렸을 때보다 몸이 개운했다. 마치 누가 내 몸을 통째로 리퍼브 처리해서 새 박스에 담아준 느낌이었다. "...설마." 설마 뭐. 이세계 전생물 클리셰? 웹소설 500화쯤 읽었으면 알 거 아니냐, 도윤아. 결제하고, 눈 떠보니 이세계. 이거 완전 정석 루트 아니냐. 근데 그게 진짜로 나한테? 허탈하게 웃음이 나왔다. 웃음소리가 텅 빈 황야에 퍼졌다가 아무 데도 부딪히지 못하고 그냥 흩어졌다. [욥기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난 그때 고시원에서 라면 먹고 있었는데요, 하나님. 삼양라면 매운맛에 계란 하나 톡 깨서. 관심 없어서 안 물어보신 거 알아요. 근데 이렇게 뒤통수 치실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일단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 휴대폰, 다 없었다. 심지어 입고 있던 추리닝도 아니었다. 웬 낡은 삼베 같은 옷 한 벌이 몸에 걸쳐져 있었는데, 재질이 얼마나 뻣뻣한지 신입 승려복 같은 느낌이었다. 대신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 있었다. [은하개척단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개척지 지정: 완료] [초기 자원을 지급합니다] 와, 미친. 진짜로 게임 창이 떴다. 이거 몰카 아니냐? 어디 카메라 숨겨져 있는 거 아니냐? 라고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카메라는커녕 편의점 하나도 없었다. 있는 건 붉은 흙, 잿빛 바위, 그리고 두 개의 태양뿐이었다. 손을 뻗어 창을 눌렀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유리도 아니고 공기도 아닌,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질감이었다. 굳이 비유하면 배달앱 화면을 만지는 느낌인데, 실제로 배달은 절대 안 되는 그런 촉감. 여기서 치킨 시키면 배달원이 뭘 타고 올까. 저 태양 중 하나를 타고 오려나. 창을 넘기자 익숙한 UI가 펼쳐졌다. 건설 탭, 채취 탭, 방어 탭, 그리고 자원 현황. 폰트마저 낯설지 않았다. 게임에서 몇백 시간을 봐온 그 인터페이스 그대로였다. 다른 건 이게 화면이 아니라 진짜 내 눈앞에 떠 있다는 것뿐. [목재: 0 / 철광: 0 / 식량: 3] 식량 3. 뭐야, 이거 편의점 삼각김밥 3개 값도 안 되잖아. 참치마요 하나, 전주비빔 하나, 불닭 하나 사면 딱 저 정도 숫자 나오겠네. 근데 그게 내 전 재산이라니, 이거 완전 파산 직전 계좌 잔고 화면 아니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봤다.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면접관 두 명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자기소개 해보세요"라고 물을 것 같은 그런 눈빛.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결국 웃었다. "그래. 어차피 고시원보다 나쁘긴 힘들지." 그 말이 얼마나 무모한 자기 위로였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됐다. 일단 건설 탭을 눌러봤다. '기초 오두막'이라는 항목이 떠 있었다. 필요 자원: 목재 20. 목재는 0개였다. [전도서 1:9, 이미 있던 것이요 후에도 있을 것이며 이미 한 일을 후에도 할지라] 그래, 노가다는 예로부터 인류의 숙명이었지. 아담도 에덴에서 쫓겨나서 땅 갈았고 나는 이세계에서 목재 캐고. 성경이랑 웹소설이 이렇게 절묘하게 겹칠 줄이야. 나는 채취 탭을 눌렀다. 반경 안에 있는 자원을 자동으로 캐낸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근처 바위에 조준선을 대고 '실행'을 눌렀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게 진짜 작동할까, 아니면 그냥 애니메이션만 나오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날까. 반신반의하며 눌렀다. 피이이잉— 쾅! 바위가 폭발했다. 정말로, 게임에서 보던 그 이펙트 그대로. 화면 안에서만 보던 파티클이, 먼지가, 파편이 실제로 내 눈앞에서 터졌다. 얼굴에 흙먼지가 확 튀었다. 먼지가 걷히고 나니 그 자리에 반짝이는 광석 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철광석 12개를 채취했습니다] 나는 한동안 입을 벌리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와. 이거 진짜네. 진짜 된다고?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게임 속 능력이 그대로 현실에서 작동한다는 건 즉, 이 세계의 법칙 자체가 내가 알던 것과 다르다는 뜻이었다. 물리학이니 화학이니 하는 것들이 여기선 그냥 참고사항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먼저 들어찼다. '이거 방치형 게임처럼 자동으로도 돌아가나?' 확인해보니 자동채취 시스템도 있었다. 일정 범위에 '드론'을 배치하면 자동으로 자원을 모아준다고 했다. 다만 드론을 만들려면 먼저 오두막을 지어야 했고, 오두막을 지으려면 목재가 필요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이거 완전 임대차 계약이랑 똑같잖아." 보증금 없으면 집 못 구하고, 집 없으면 보증금 못 모으는 그 지랄맞은 순환. 여기 와서도 부동산 스트레스를 받을 줄은 몰랐다. 이세계까지 와서 전세사기 걱정을 해야 하나. 다행히 근처에 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잎사귀 색깔이 초록이 아니라 짙은 보라색이라는 게 좀 거슬렸지만, 목재로 변환된다면 색깔 따위 신경 쓸 계제가 아니었다. 나는 채취 탭으로 그것들을 향해 조준선을 겨눴다. 피이이잉— 쾅! 나무가 통째로 사라지더니 목재 상자로 변환됐다. 나무 한 그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딱 정육면체 상자 하나만 남는 게, 뭔가 환경파괴범이 된 기분이었다. 근데 이 세계에 그린피스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좋아, 이거 완전 마인크래프트네. 두 시간쯤 지나자 목재 40개, 철광 30개가 모였다. 손끝이 얼얼했지만 이상하게 힘든 줄도 몰랐다. 아드레날린인지 이세계 버프인지, 뭐가 됐든 지금은 감사할 일이었다. 나는 오두막을 지었다. 건설 버튼을 누르자 눈앞에서 나무 판자들이 저절로 조립되며 순식간에 작은 오두막이 세워졌다. 촤르르르륵! 소리가 나면서 벽이 하나씩 올라갔다. 마치 3D 프린터로 집을 뽑아내는 것 같았다. 기둥이 세워지고, 지붕이 얹히고, 문짝까지 저절로 달렸다. 인테리어 업체가 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속도였다. [기초 오두막이 건설되었습니다] 나는 완성된 오두막 앞에서 손을 허리에 얹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 도배 하나도 안 시켰는데 도배업체보다 빠르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이세계 왔지,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이내 지웠다. 뭐,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만족감을 느낄 처지는 아니었다. 그때였다. 부스럭. 등 뒤 바위 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나는 조준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손가락이 실행 버튼 위에서 멈췄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림자 하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이쪽을 엿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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