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정하윤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문 안쪽에서 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번쩍.
그르렁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안쪽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강도현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방금 뭐가 지나간 거지.
죄송합니다. 신입 등록 중 가끔 미로형 짐승이 새어 들어옵니다.
정하윤이 태연하게 설명했다.
가끔이라니, 방금 죽을 뻔했잖아요.
뒤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다리도 후들거리는 게 보였다.
이미 처리됐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정하윤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경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강도현은 그 안쪽을 살짝 들여다봤다.
바닥에 검은 재 같은 흔적만 남아 있었다.
처리가 빠르네.
강도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방금 그 짐승, 몇 초 살았을까.
셈이 빠르게 돌았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녹색 머리, 안경, 그리고 미용 점.
카운터 위에는 서류 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옆에 식어버린 커피잔도 하나 놓여 있었다.
어머, 벌써 오셨네요.
그녀가 웃으며 인사했다.
여현주라고 합니다. 등록 담당관이에요.
여현주가 손을 내밀었다.
강도현입니다.
강도현이 짧게 답례했다.
손을 맞잡는 순간, 손끝이 서늘했다.
평범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여기 방금 짐승이 나왔었다고 들었는데요.
강도현이 물었다.
종종 있는 일이에요.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여현주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종종이라는 말이 걱정되는데요.
강도현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한두 번도 아니고, 종종이라니.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일단 등록부터 하시죠.
여현주가 서류 같은 것을 내밀었다.
서류 표지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넘겨보니 안쪽도 텅 비어 있었다.
이거 백지 아니에요?
강도현이 서류를 흔들며 물었다.
등록이 완료되면 자동으로 채워져요.
여현주가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손을 여기 올려주세요.
여현주가 카운터 위의 수정구를 가리켰다.
수정구는 주먹만 한 크기였다.
표면에 실핏줄 같은 무늬가 흐르고 있었다.
강도현은 손을 얹었다.
수정구가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처음엔 미약했다.
점점 밝아지더니 손바닥 전체를 감쌌다.
[탐색자 등록 진행 중]
허공에 문구가 떠올랐다.
강도현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옆에서 여현주가 팔짱을 낀 채 지켜봤다.
표정에 별다른 기대감은 없어 보였다.
수정구의 빛이 한 차례 크게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직업 판정 결과 : 탐색자 (기본형)]
뭐야.
강도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검사도 마법사도 아니고, 그냥 기본형이라니.
허탈함이 밀려왔다.
옆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은 화려한 문구를 받았는지 소리를 질렀다.
저쪽은 정령사라나 뭐라나.
강도현은 그 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비교하면 더 서글퍼질 것 같았다.
기본형이면 뭐가 다른데요.
강도현이 여현주에게 물었다.
특수 스킬 없이, 신체 능력치만 성장하는 유형이에요.
여현주가 조심스레 설명했다.
그거 그냥 노가다 아니에요?
강도현이 픽 웃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 아쉬운 판정이긴 해요.
여현주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기본형이라서요.
여현주가 덧붙였다.
몇 년 만에 처음이라니, 그거 위로예요 아니면 팩트예요.
강도현이 되물었다.
여현주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웃는 얼굴이 더 얄미웠다.
됐어요. 뭐 어쩌겠어요.
강도현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기대를 안 하는 게 나았다.
속으로 그렇게 정리했다.
그런데 판정서 구석에, 이건 뭐예요?
강도현이 손가락으로 서류 한 귀퉁이를 가리켰다.
작은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다.
부가 조건 : 전략적 사고 감지, 조건부 활성.
글씨가 너무 작아서 눈을 찡그려야 읽혔다.
일부러 숨겨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거 처음 봐요.
여현주가 눈을 가늘게 뜨며 서류를 들여다봤다.
여현주가 서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폈다.
불빛에 비춰보기까지 했다.
무슨 뜻이에요, 이게.
강도현이 물었다.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이런 문구는 흔치 않아서요.
여현주가 고개를 저었다.
십 년 넘게 등록 업무만 봤는데, 처음이에요.
여현주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조건부라는 게, 뭔가 발동 조건이 있다는 소리겠죠.
강도현이 팔짱을 꼈다.
그럴 수도 있어요. 일단 임무 중에 자연히 드러날 거예요.
여현주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임무 나가서 갑자기 이상한 거 튀어나오면 어떡해요.
강도현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그때 다시 저를 찾아오세요.
여현주가 명함 같은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에는 여현주의 이름과 연락 방식만 적혀 있었다.
쓸데없이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강도현은 판정서를 다시 들여다봤다.
전략적 사고 감지, 라는 문구가 눈에 박혔다.
이거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강도현은 속으로 되짚었다.
기획팀에서 몇 년을 굴렀나.
전략적 사고라면 자신 있었다.
숫자 맞추고 변수 계산하는 일로 인생 절반을 갈아 넣었다.
그게 여기서도 먹힐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기본형이라 실망스럽긴 한데, 이 문구가 진짜라면.
강도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노가다도 머리 쓰면 다르게 풀리는 법이지.
속으로 그렇게 결론 내렸다.
등록소 밖에서 이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도현씨, 안 나와요?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섞여 있었다.
기다리는 게 익숙하지 않은 말투였다.
강도현은 서류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나가야겠다.
여현주에게 짧게 인사하고 문을 향해 걸었다.
문은 여전히 소리 없이 열렸다.
밖으로 나서자, 이서정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판정 뭐 받았어요?
이서정의 시선이 강도현의 손에 든 서류로 향했다.
궁금함을 숨기지 않는 눈빛이었다.
기본형이요.
강도현이 무심하게 답했다.
이서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럼 나보다 아래겠네요.
이서정이 자기 서류를 슬쩍 흔들어 보였다.
표지에 화려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발키리래요, 나는.
이서정이 자랑스레 말했다.
강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디 두고 보시죠.
속으로만 그렇게 대답했다.
주머니 속 서류가 유난히 두껍게 느껴졌다.
전략적 사고 감지, 라는 문구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서정이 앞장서 걸어가며 뭔가 말을 걸었다.
강도현은 대충 대답하며 뒤를 따랐다.
등록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쿵.
그 소리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뭔가 시작됐다는 신호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