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눈떠보니 죽어가는 성주였다

1화

빵! 클랙슨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인생이 그렇다. 항상 늦게 알아차린다. 나는 이도현, 스물세 살, 어느 대학교 학생회장.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다. 술자리 마치고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 하나 입에 물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게 마지막 기억이다. 신호는 분명 초록불이었다. 아니었나? 그것도 이제 와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 [욥기 14: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날이 적고 걱정 근심이 가득하며] 적다는 말은 맞다. 근심도 맞다. 근데 하필 이 타이밍에 성경 구절이 왜 튀어나오는 건데. 나 신학과도 아니고 그냥 경영학과였는데. 의식이 있는데 몸이 없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둥둥 떠 있는 것 같은데 눈은 안 떠지고, 대신 뭔가 뜨겁고 축축한 게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살면서 이렇게 무기력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시험 전날 밤새 공부해도 안 외워지던 전공 용어들보다 지금 이 순간이 훨씬, 훨씬 막막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이 떠졌다. 번쩍! 천장이 낯설었다. 대학 원룸의 형광등이 아니라 무슨 사극에서나 볼 법한 나무 서까래였다. 그럴 리가. 설마. 뭐지, 나 죽은 거 아니었나? 몸을 일으키려는데 온몸이 불타는 듯했다. 정확히는 오장육부가 통째로 삭는 느낌이었다. “으, 으아아아…….”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낮고, 잠긴, 그러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위엄이 섞인 청년의 목소리. 목소리 하나 바뀐 것뿐인데 소름이 쫙 돋았다. 노래방에서 남의 예약곡 부른 것도 아니고, 이건 완전 남의 몸을 통째로 빌려 쓰는 느낌이었다. 손을 들어 보니 손가락이 길고 창백했다. 손톱 밑이 시퍼렜다. 딱 봐도 정상 상태가 아니었다. 독이다. 그냥 감이 왔다. 대학 시절 추리소설 좀 읽었다고 이런 데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몸속에서 뭔가가 혈관을 타고 퍼지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마치 배달 앱으로 주문한 마라탕이 위장을 통과하는 속도로, 아주 친절하게, 아주 확실하게 나를 죽이려는 중이었다. 심지어 매운맛 단계가 하나가 아니었다. 대사·중사·특사가 한꺼번에 몸속에서 섞이는 것 같은, 그런 다단계 고통. “…살, 살려…….”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뱉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방은 넓었다. 붉은 비단 이불에, 벽에는 용 그림 병풍, 창밖으로는 처마가 겹겹이 늘어선 전각들이 보였다. 한마디로, 완전 사극 세트장. 근데 이게 세트장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배 속을 찢는 통증이 계속 증명하고 있었다. 세트장이면 이렇게 아플 리가 없잖아. 배우들 CG로 대충 때우지, 진짜 독을 먹이진 않는다고.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번 죽었는데 이게 심판인가? 뭔 심판이 이렇게 아파. 심판이면 최소한 판결문이라도 좀 읽어주고 시작하든가. 다짜고짜 몸부터 태우는 심판이 세상에 어디 있어.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에서 쇳내가 났다. 피 냄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형용하기 애매한 비린 향. 그때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다급하지만 조심스러운, 누군가를 깨우고 싶지 않은 듯한 걸음.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살아있는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육감이 뒤통수를 찔렀다. 왜 그런 육감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대학 시절 조별과제에서 무임승차한 팀원 눈치 볼 때 느꼈던 그 감각과 비슷했다. 들키면 뭔가 골치 아파진다는, 딱 그 느낌. 문 틈으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아직, 아직 안 들어가는 게……” 젊은 여자애 목소리였다. 겁먹은 게 확실했다. “쉿. 조용히. 지금 어의가 온다니까.” 남자아이 목소리도 섞였다. 둘 다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게 발소리로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 왜 안 들어오지? 성주 몸이면 시녀나 시종이 있어야 정상 아닌가? 설마 이 방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금기인가. 아니면 지금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너무 끔찍해서 못 들어오는 건가. 둘 다일 수도 있고. 일단 나는 몸 상태를 파악하는 게 급했다. 숨을 천천히 골랐다. 배 속에서 뭔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정확히는 세 갈래로 갈라진 기운이 서로 부딪히며 몸을 갈아먹는 느낌. 독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두세 가지가 섞인, 아주 정성스럽게 조합된 칵테일. 이걸 만든 사람,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나 보네. 그냥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확인사살까지 하고 싶었나 보다. 하나로 안 죽으면 둘, 둘로 안 죽으면 셋. 무슨 보험 특약처럼 겹겹이 쌓아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시야 한가운데에 뭔가 떠올랐다. 처음엔 눈에 뭐가 낀 줄 알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런가 하고 눈을 비볐는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반투명한 사각형의 빛, 그 안에 글자가 떠 있었다. 마치 게임 로딩 화면 같은. [숙주의 생명 반응이 위험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뭐라고? 숙주? 나 지금 뭐 취급 받는 거지, 이거? 숙주라니. 나 무슨 좀비 영화 감염체도 아니고, 갑자기 그런 용어 쓰면 사람이 서럽잖아. 분명히 아까까지 죽어가는 중이었는데, 이 타이밍에 무슨 시스템 창이 뜨는 건데. 너무 뻔뻔한 등장 아닌가. 사람 죽어가는 거 뻔히 보면서 로딩 화면 띄우는 거, 이거 완전 배틀그라운드 접속 지연 아니냐고. [긴급 처치를 실행합니다. 대가를 지불하시겠습니까?] 대가는 또 뭔데. 나 지금 협상할 처지가 아니잖아. 죽어가는 사람한테 결제 창 띄우는 거, 이거 완전 앱 결제 유도 아니냐. 동의 안 누르면 계속 뜨는 광고 배너처럼, 시야를 통째로 가리는 그 창이 사라질 생각을 안 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이, 아니 마음속의 뭔가가 저절로 ‘예’를 눌렀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이 몸도, 이 정신도 동시에 알아차린 거다. 번쩍!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고, 나는 그대로 다시 정신을 놓았다.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는 통증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딱 배달 늦게 온 치킨 식은 것처럼 미묘하게 불쾌한 잔열만 남은 정도. 몸을 움직여봤다. 손가락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손톱 밑 시퍼런 빛깔은 조금 옅어져 있었다. 숨을 쉬는 것도 조금 편해졌다. 산 것 같긴 한데, 완전히 산 것 같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 이건 뭐 반값 할인 받은 것도 아니고, 딱 절반만 죽었다가 살아난 느낌이었다. [숙주 이서준. 생명 반응 안정화 완료. 남은 독소 32%.] 이서준. 그게 이 몸의 이름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 몸속에서, 이도현이라는 이름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정신이었다. 뭐야, 이거 완전 신분 위장 스릴러 같은데. 근데 나는 스릴러 주인공이 아니라 그냥 어제까지 삼각김밥 먹던 대학생이었단 말이지. 주인공 자격 심사 같은 거 봤으면 진작 떨어졌을 스펙인데. 창 안의 글자가 다시 바뀌었다. [알림: 새로운 존재를 감지했습니다.] [준비 중…….] 뭘 준비하는데. 커피? 아니면 또 다른 결제 창? 이번엔 구독형인가, 일회성 결제인가. 그때, 창이 크게 확장되며 눈앞을 통째로 덮었다. 빛이 서서히 형태를 갖췄다.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그저 어떤 ‘무게’ 같은 것이 눈앞에 자리를 잡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단순히 놀라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본능적으로 위계를 느끼게 하는 종류의 서늘함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고 낮은,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어떤 무게를 가진 음성. 그 음성이 방 안의 공기를 눌렀다. 비단 이불도, 용 그림 병풍도, 다 그 목소리 앞에서는 배경 소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천마시제.” 그 두 글자가 내 이름처럼, 아니 내 운명처럼 방 안에 울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 짧은 되물음 뒤로, 방 안의 온도가 한순간에 달라진 걸 느꼈다. 숨죽인 정적. 문밖의 발소리도 어느 순간 멈춰 있었다. 마치 이 방 전체가,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무대 같았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나는 이제 막 대본도 안 읽고 캐스팅된 신인 배우처럼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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