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눈떠보니 죽어가는 성주였다

5화

고천국 주둔군 교위, 양진우. 그 밤, 나는 청류성 인근 산길을 순찰 중이었다. 왕권 행사 감찰이라는 명목으로 이 성 근처를 도는 게 이번 임무였다. 사실 감찰이라는 게 뭐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남의 집안일에 숟가락 얹고 다니면서 “저 여기 왔다 갔습니다” 도장 찍는 자리다. 다만 이 도장이 왕실 결재 서류에 박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게 문제다. 청류성은 최근 이상한 소문이 많았다. 성주가 급사했다는 이야기, 상속 대전이 곧 열릴 거라는 이야기, 심지어 성주가 죽기 전날 밤 성 전체가 이상한 빛에 휩싸였다는 시골 아낙네들 입담까지. 관할 밖의 일이지만, 감찰관이라는 직책이 그렇다. 관할 밖의 일도 냄새를 맡아야 밥값을 하는 자리다. 콧구멍을 벌리고 킁킁거리며 사는 게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이다. 말을 천천히 몰며 산길을 훑었다. 밤바람이 차서 목덜미가 뻣뻣했다. 부하들은 성 초입에 대기시켜 두고 나 혼자 나선 길이었다. 이런 건 인원이 많다고 좋은 게 아니다. 오히려 눈에 잘 걸린다. 한밤중, 성 아래쪽 지하 방향에서 갑작스러운 기운의 파동이 느껴졌다. 말 위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고삐를 당겼다. “이건……” 말이 놀라서 앞다리를 살짝 들었다. 나는 고삐를 짧게 잡아 진정시키며 눈을 감았다. 감각을 열어 다시 그 파동의 결을 짚었다. 단순한 무예 수련의 여파가 아니었다. 그런 파동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것이다. 무인들이 밤에 몰래 수련하다가 힘 조절 못 해서 기운 새는 일, 그거 하루에도 몇 건씩 보는 게 감찰관 일이다. 하지만 지금 느껴진 파동은, 마치 삼십 년간 봉인된 무언가가 순식간에 풀려나오고, 다시 순식간에 갈무리된 것 같은 흐름이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파동의 근원에서, 낯익은 서명 같은 기운이 섞여 있었다. 청류성 성주가에 대대로 이어져온 특유의 혈맥 반응이었다. 나는 이 혈맥 반응을 안다. 예전에 청류성 관련 사건 기록을 훑을 때 자료로 몇 번 대조했던 서명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강도가 이상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어떤 청류성 성주의 기록에도, 이 정도 규모의 반응이 남은 적은 없었다. 마치 십 년 치 적금을 하루 만에 다 몰아넣고 이자까지 통째로 뽑아낸 것 같은 규모였다. “성주가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나는 말 위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죽은 자에게서 이런 파동이 나올 리 없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였다. 소문이 거짓이거나, 아니면 성주라는 이름을 빌린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에 있거나. 어느 쪽이든, 심상치 않았다. [욥기 38:11, 네가 여기까지만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파도가 여기서 그치리라] 경계선을 넘었다는 감각이 들었다. 청류성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치고는 너무 큰 파동이었다. 이건 단순한 계승 다툼이 아니라, 더 큰 흐름과 맞닿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청류성의 실권자 황태석은 왕실과도 은밀히 선을 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상속 대전을 서두르는 이유가 단순히 개인적 야심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세력의 요청이라면. 그렇다면 이 조용한 지방 성 하나가, 왕실 권력 구도 전체를 흔드는 뇌관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나 같은 말단 교위가 감당하기엔 벅찬 그림이었지만, 벅차다고 안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계승의 중심에 있는 자가 이토록 압도적인 힘의 파동을 일으켰다면. 이건 청류성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을 돌려 산 아래로 방향을 잡았다. 좀 더 가까이서 확인해야 했다. 발굽 소리를 죽이려 흙길 가장자리로 붙어 걸었다. 그때, 파동의 흔적이 급격히 옅어지며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갈무리한 것처럼, 매끄럽고 절제된 방식으로. 이 정도의 힘을, 이 정도로 정교하게 감출 수 있는 자가, 이 조용한 지방 성에 있다니. 등줄기가 서늘했다. 오랜 감찰 생활 동안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몇 번 없었다. 손끝이 저릴 정도의 위화감, 이건 보고서 몇 줄로 눙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청류성.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되새겼다. 이건 보고서 한 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말머리를 성문 방향으로 완전히 돌렸다. 오늘 밤은 순찰 일정을 조금 어겨도 될 것 같았다. *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나는 그 순간 밖에서 뭔가가 나를 감지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냥 뇌옥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 있었다. 마치 편의점 삼각김밥을 급하게 먹다가 목에 걸린 기분이랑 비슷했다. 근데 그 삼각김밥이 삼십 년 묵은 마도 수련자의 내단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스킬 목록 확인 가능] [열람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열람해야지.” 이런 걸 안 열어보면 그게 사람이냐. 나는 숨도 제대로 못 고른 채로 손을 뻗어 창을 눌렀다. 창이 확 펼쳐지며 목록이 쏟아졌다. 촤르르르륵! 수백 개, 아니 수천 개의 이름이 스크롤처럼 흘러내렸다. 초식 이름, 호흡법, 심지어 독을 다루는 법까지. 하나하나 눈에 담기도 전에 다음 줄이 밀려 내려왔다. 마치 편의점에서 로또 명당이라고 소문난 곳에서 십만 원어치 긁었는데 전부 당첨된 기분이었다. 근데 당첨금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는, 딱 그런 상황. “이걸 다 어떻게 다 써…….”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곽노사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네놈, 대체 뭐냐.” 목소리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평생 봉인당해도 두려운 기색 하나 없던 노인이, 지금은 나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존재로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꽤 인상적이었다. 방금까지 나를 애송이 취급하던 눈이, 지금은 도살장 앞에 끌려온 소를 보는 정육점 주인의 눈처럼 변해 있었다. “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웃었다. “나도 나를 잘 몰라.” 그건 진심이었다. 시스템도 나도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로, 이 몸에 강제로 묶여 있는 사이였으니까. 뭐랄까, 결혼 정보 업체에서 급하게 매칭시켜준 사이랄까. 서로 취향도 모르고 일단 혼인신고부터 한 꼴이었다. 윤소하가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성주님, 정말 큰일이에요. 이 정도 기운이면 성 전체에 소문이 날 텐데.” 그 말투에는 걱정과 함께, 나를 향한 묘한 경외심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걷지 못하는 나를 부축하며 눈물짓던 사람이, 지금은 나를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김두식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사람은 원래도 안색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거의 백지장이었다. “지금 당장 이 뇌옥을 빠져나가야 해요. 누가 보기 전에.” “맞는 말이네.” 나는 곽노사를 내려다봤다. 그는 이제 저항할 힘이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아까 그 압도적이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그냥 지친 노인 하나가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 노인은 어떻게 하지?” [임무 완료: 곽노사 제압] [처리 방안: 재봉인 또는 회유] 회유라는 단어가 뜬 걸 보고, 문득 이 노인을 그냥 다시 가둬두는 것보다 뭔가 더 얻을 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 년을 이 뇌옥에서 썩힌 사람이다. 그 안에 쌓인 원한이든 정보든, 어떻게든 써먹을 구석이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나팔이 언제 울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노인 하나 붙잡고 인생 상담을 해줄 여유는 없었다. “일단 다시 봉인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곽노사가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흥. 다음에도 그 오만함이 통할지 보자, 애송이.” 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협박이라기보다는 그냥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지막 발버둥처럼 들렸다. 부적을 다시 붙이고 문을 닫았다. 화악, 불빛이 다시 문틀을 감싸며 봉인이 걸렸다. 뇌옥 안이 다시 어둠에 잠겼다. [임무 보상 지급 완료] [해독제 재료 확보: 흑목련 뿌리(1), 은사초(0), 야명주 가루(0)] 일부만 확보된 모양이었다. 완전한 해독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뜻이었다. 흑목련 뿌리 하나로 만족해야 하나. 나머지 두 개는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건지, 이걸 물어볼 상대도 없었다. 윤소하와 김두식과 함께 뇌옥을 빠져나오는 길, 계단을 오르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 하루 사이에,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남의 몸에 들어와 있고, 정체불명의 시스템에 종속됐고, 삼십 년 봉인된 마도 수련자의 힘을 통째로 흡수했다. 이 정도면 하루짜리 드라마 한 시즌은 뽑겠다. 근데 아직 1화도 안 끝난 기분이라는 게 더 무서운 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독은 절반도 안 빠졌고, 상속 대전은 코앞이었고, 황태석이라는 배후는 아직 손도 안 댄 상태였다. [전도서 1:9,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새것이 없다니, 지금 이 상황이 딱 그 반대인데. 하루에 이렇게 새로운 게 쏟아지는데. 성경 쓰신 분, 오늘 제 하루는 못 보셨겠죠. 계단을 다 오르자 새벽빛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밤새 뇌옥 안에서만 있어서 그런지, 그 흐릿한 빛이 유독 눈부시게 느껴졌다. 윤소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는 눈빛이 진지했다. “성주님,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 질문에 답을 하려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뿌우우우웅! 계단을 오르던 발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김두식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건, 상속 대전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예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나는 아직 해독제 재료도 다 못 구했고, 이 힘을 어떻게 쓰는지도 감을 못 잡았고, 곽노사한테 뭘 회유할지 생각도 못 끝냈는데. 황태석이 움직인 거다. 이 인간, 성급이 아니라 아예 도둑놈처럼 판을 짜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이서준이라는 몸으로 그 대전 한복판에 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윤소하와 김두식의 얼굴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나는 계단 위쪽, 새벽빛이 비치는 문을 올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일단 가긴 가야겠네.” 준비가 안 됐다고 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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