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존재의 형체가 흐트러지듯 흔들리며 다가왔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나무 마루가 살짝 뜨겁게 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방 안 등불이 하나씩 꺼졌다. 등불이 꺼지는 순서가 규칙적이어서, 나는 그 순간에도 다음 등불이 몇 초 뒤에 꺼질지 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숫자를 세는 나 자신이 한심했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도망쳐!"
강다연이 소리쳤다. 처음으로 큰 목소리였다. 나는 다리가 풀린다는 감각과 도망쳐야 한다는 판단이 동시에 왔는데, 몸이 그 둘을 조율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머리는 도망치라고 명령을 내리는데 발은 그 명령서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굳어 있었다.
오유슬이 내 팔을 잡으려다가, 잡지 못하고 헛손질을 했다. 손가락 사이로 내 팔뚝이 그대로 통과했다. 물건도 사람도 만질 수 없다는 그 제약이 이 순간에 이렇게 잔인하게 작용할 줄은 몰랐다. 오유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를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통역자는 특별한 맛이 나거든. 여러 존재의 말을 담아본 그릇이니까.]
말투가 능글맞으면서 동시에 서늘했다.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뒷걸음질쳤다. 등이 벽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벽에 걸려 있던 장식용 접시 하나가 진동에 떨려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소리가 났는데도 아무도 그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죽음이 코앞이면 접시 따위 아무 의미가 없구나, 그런 생각이 스쳤다.
"저기, 저 처음 왔는데요. 오늘 첫날인데요."
존재가 잠깐 멈췄다. 그림자 사이로 눈처럼 보이는 부분이 나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 시선이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 체감으로는 십 분쯤 됐는데, 실제로는 아마 이 초도 안 됐을 거다. 공포는 시간을 이상하게 늘린다는 걸 이럴 때 알게 됐다.
[처음이라고 봐줄 것 같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억울하지 않을까 해서요. 신입한테 이러는 건 좀. 다른 사람은 없나요? 저보다 경력 오래된 분이라든가."
한심한 협상이었다. 근데 그 순간 내 머리에 떠오른 건 이상하게도 돈 계산이었다. 이거 시급도 못 받고 죽으면 완전 손해 아닌가. 근로계약서에 산업재해 조항이라도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지만, 무섭다는 감정을 그렇게 우회하지 않으면 다리가 완전히 풀려버릴 것 같았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의외로 사소한 것에 매달린다는 걸, 나는 오늘 처음 배웠다.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아쉬운 대로 너부터 맛을 보지.]
그림자 팔 같은 게 뻗어왔다. 순간 방 전체 온도가 뚝 떨어졌다. 코끝이 시큰거리고, 아까부터 낯설던 여자 몸의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두 배로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는데, 이 몸의 심장인지 내 정신이 만드는 착각인지 구별이 안 됐다.
그때 복도 끝에서 뭔가 쩌렁,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멈추어라."
낮고 울리는 목소리였다. 방금 그 존재의 목소리보다 훨씬 무겁고 단단했다. 복도 끝에서 은색으로 번쩍이는 형체가 걸어들어왔다. 전신을 은색 갑옷으로 덮은 모습이었는데, 얼굴은 투구에 완전히 가려져 있어서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걸음걸이마다 갑옷 관절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에는 거대한 가위가 들려 있었다. 정원용 전지가위 같은 모양인데, 크기가 사람 몸통만 했다. 저걸로 뭘 자르려는 건지, 저 가위 앞에 서면 나 같은 건 한 뼘도 안 되는 존재가 될 것 같았다.
"묵한 님!"
오유슬이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에 안심이 섞여 있었다.
그림자 존재가 갑옷을 돌아보더니 잠깐 형체를 일그러뜨렸다.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보안이 나서다니, 규칙 위반이 아닌가?]
"손님이 규칙을 먼저 어겼느니라. 봉인을 스스로 풀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지어다."
말투가 예스러웠다. 인간의 말투와는 확연히 다른 리듬이었다. 갑옷이 가위를 슥, 들어올렸다. 날이 등불에 비쳐 번쩍였다. 그 번쩍임 한 번에 방 안 공기가 팽창하는 것 같았다.
[흥, 이 정도 인간 부스러기 하나 갖고 뭘 그리 유난이냐.]
"저 아이는 오늘 계약을 맺은 관의 소속이니라. 관에 속한 것을 함부로 취하려 하는 자에게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응당한 처분이 따를지어다."
그림자 존재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곤 웃음소리 같은 걸 흘렸다. 그 웃음이 웃음인지 조롱인지 구분이 안 됐는데, 어느 쪽이든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좋다. 오늘은 물러나마. 하지만 저건 기억해두지.]
그림자가 다시 뭉개지듯 흩어졌고, 방금까지 있던 존재가 스르륵 사라졌다. 방 안 온도가 서서히 올라왔다. 방금까지 꺼졌던 등불도 하나씩 다시 켜졌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손끝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데, 그게 도리어 아프게 느껴졌다.
"괜찮아?"
강다연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손이 차가웠는데, 방금 그림자한테서 느낀 냉기와는 다른 종류의 서늘함이었다. 사람의 손이 원래 이렇게 서늘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겨우 균형을 잡았다.
묵한이 가위를 어깨에 걸치며 나를 내려다봤다. 투구 안에서 눈빛 같은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이름이 무엇이냐."
"이도현이요."
"기억해두겠다. 앞으로 저런 놈들이 계속 널 노릴 것이니라."
"저를요? 왜요? 저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요."
"통역자는 흔치 않다. 여러 존재의 언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은 특히 그렇지. 네 존재감이 옅은 것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존재감이 옅다는 게, 정확히 어떤 뜻인가요?"
"평범한 인간에게는 없는 그릇이다. 네가 지금까지 남들에게 잘 잊혔던 것도, 사람 무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지 않았던 것도 그 그릇 때문일 것이니라."
존재감이 옅은 것과 통역 능력이 관련 있다는 말에 나는 뭔가 얹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을 갉아먹던 결점이 사실은 여기서 필요한 조건이었다는 사실이, 안심되면서도 동시에 씁쓸했다. 평생 콤플렉스로 여기던 게 실은 스펙이었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싶었다.
오유슬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까···미안해. 널 못 잡아줘서."
"괜찮아요. 손이 안 닿는 걸 어떻게 해요."
"그리고, 그 방 말이야. 아까 내가 말 안 해준 거···"
오유슬이 시선을 피했다. 뭔가 더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걸 캐물으려 했다. 오유슬 씨, 그 방에 뭐가 있었는지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하고 물으려는 순간 그 순간 관 전체에 낮은 종소리가 울렸다.
강다연이 표정을 굳혔다.
"누나가 연락했나 봐."
허공에 수정구가 떠올랐다. 그 안에서 누나의 얼굴이 나타났는데, 표정이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도현아, 첫날부터 고생 많았네."
"누나, 이게 무슨 일이었어요? 저 죽을 뻔했는데요. 시급이 아니라 목숨값을 받아야 할 판인데요."
"알아. 그래서 지금 계약 조건을 좀 바꾸려고."
바꾼다는 말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조건이 바뀐다는 건 대체로 좋은 쪽보다 복잡한 쪽으로 흘러갔던 게 지금까지의 경험이었다.
"어떻게 바꾸는데요?"
"묵한이 널 지켜주는 대신, 넌 이제부터 묵한의 지시를 따라야 해. 그리고 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접근 권한이 좀 더 넓어질 거야. 대신, 그만큼 관에 얽매이는 시간도 늘어나겠지."
"···그게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누나가 웃었다. 대답 대신이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대답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더 불안해졌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서 쉬어. 내일 밤에 또 보자."
수정구가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방금 벌어진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봤다. 그림자 존재의 지목, 묵한의 개입, 그리고 계약 조건의 변화. 하나같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정되고 있었다. 내 인생인데 결정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게, 새삼스럽게 억울했다.
오유슬과 강다연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는데, 그 눈빛에 뭔가 불편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이 뭔가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게 있다는 느낌이 점점 확실해졌다. 나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느꼈다.
오늘 하루 동안, 나는 아무것도 아니던 존재에서 누군가에게 정확히 지목당하는 존재가 됐다. 그리고 그 변화가 딱히 반갑지만은 않다는 것도. 방금까지 나를 죽이려 했던 존재가 남긴 말, 저건 기억해두지, 라는 그 한 문장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 하루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