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강사님, 그 피는 못 드려요

2화

차갑다. 바늘 끝이 살갗에 닿기 직전, 하린은 그 냉기부터 먼저 느꼈다. 곽태산의 손이 등잔불 아래서 은빛으로 번뜩였다. 가늘고 긴 침, 끝이 사람 눈썹처럼 휘어 있었다. 저게 손목 안쪽 혈맥에 박히면 어떻게 되는지, 하린은 이미 반년 전에 한 번 봤다. 다른 아이의 팔뚝이 새파랗게 부어오르던 모습을. 곽태산의 손목이 움직였다. 그 순간, 하린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뒤집혔다. 반년 내내 잠들어 있던 감각이었다. 전생에서, 그녀는 계약서 앞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직업이 뭐였는지는 이제 흐릿했다. 사무실 풍경도, 동료들의 얼굴도 안개처럼 흩어진 지 오래였다. 다만 손끝이 종이의 결을 훑을 때, 문장 하나가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저절로 짚어내던 습관만은 몸에 새겨져 있었다. 활자 사이에 숨은 함정을 찾아내던 눈. 어느 문장 뒤에 어떤 문장이 와야 정상인지 본능적으로 아는 감각. 그 습관이, 지금 눈앞의 종이를 읽어 내고 있었다. 곽태산의 손에 들린 계약서, 두꺼운 한지에 붉은 인주로 원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그 안에 하린의 이름이, 아니 이름이 아니라 숫자가 적혀 있었다. 〈원 안에 피가 떨어지는 순간, 계약은 완성된다.〉 〈완성되면 취소 조항이 없다.〉 〈서명자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는 문구가 없다.〉 정상적인 계약서라면 있어야 할 게 하나도 없었다. 동의 확인도, 철회 기간도, 위반 시 구제 절차도. 전생이라면 이런 종이는 도장 찍히기도 전에 반려됐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짜리 애들에게 종이를 들이밀고 손끝을 그으면 끝이었다. 하린은 남은 힘을 손끝에 모았다. 손목을 비틀지 않았다. 비틀면 곽태산의 손아귀가 더 세게 조여들 뿐이었다. 대신 목소리를 냈다. 침착하게. 목구멍이 바싹 말라 있었지만, 침착하게. "이거, 제 이름이 아니라 제 영맥 등록번호로 되어 있는데요." 곽태산의 손이 멈칫했다. 바늘 끝이 살갗에서 한 뼘쯤 떨어진 채로 멈췄다. "뭐?" "여기, 밑에." 하린이 턱짓으로 종이 하단을 가리켰다. 작은 글씨로 새겨진 숫자열이 있었다. 영술 협회에 등록된 각성자 고유번호, 하린도 반년 전 처음 이 별채에 발을 들였을 때 딱 한 번 본 숫자였다.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 지금은 알았다. 저 숫자가 하린이라는 사람을 대신하는 또 다른 이름이라는 걸.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계약이 체결되면, 나중에 계약 파기할 때 제가 아니라 그 번호를 가진 다른 사람이 대신 책임지게 되는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린도 확신은 없었다. 전생에서 다뤘던 계약서들과 이 세계의 계약이 같은 논리로 돌아가는지,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문장의 형태가 이상했다. 정상적인 계약서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이름 대신 번호만 덜렁 적어 넣지 않는다. 그 어색함을 파고든 것뿐이었다. 하지만 곽태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번, 두 번.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종이 위 숫자를 다시 훑는 게 보였다. 그 흔들림이 답이었다. 〈걸렸다.〉 속으로 되뇌면서도, 하린은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입가에 힘을 빼고, 눈은 곽태산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손에 들린 종이만 응시했다. 확신 있는 사람은 저렇게 눈을 굴리지 않는다. 확신 있는 사람은 코웃음을 치고 바로 밀어붙인다. "어린애가 뭘 안다고." 곽태산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하지만 손목을 쥔 힘은 약해져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힘이 빠지는 게 손목 피부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하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여쭤볼게요. 협회에 등록번호로 계약하는 게 맞는지." "쓸데없는 소리." "제가 잘못 알고 있으면 지금 찍을게요." 하린은 일부러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끝이 후들거렸다. 허세였다. 잡힌 손목이 시큰거려서 떨리는 건지, 겁이 나서 떨리는 건지 하린 자신도 구분이 안 갔다. 하지만 그 떨림을 곽태산 앞에서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 사람은 지금 확신이 없다.〉 확신 없는 사람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전생에서도 봤던 얼굴이었다. 증거 없이 밀어붙이다 역으로 걸릴까 봐 발을 빼는 얼굴. 계약 하나 잘못 체결했다가 나중에 감사에서 걸려서 자기 자리가 날아갈까 봐 손이 굳는 그 얼굴. 곽태산은 은침을 거뒀다. 챙, 하는 쇳소리가 났다. 바늘이 다시 목함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였다.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손목을 놔주는 손길이 거칠었다. 하린은 뒤로 물러나며 손목을 감쌌다.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 있었다. 손가락 다섯 개가 그대로 찍힌 자국, 하루 이틀은 지워지지 않을 색이었다. "대신." 곽태산이 종이를 말아 쥐며 하린을 내려다봤다. 그 눈빛이 아까와는 달랐다. 당황이 가시고, 그 자리에 다른 계산이 들어차 있었다. "사흘 준다. 사흘 안에 안 찍으면, 네 부모한테 위약금 청구서 날아갈 거야. 반년 수업료 전액에 위약금까지." 하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숨이 턱 막혔다. 방금 전 계약서 한 장 막아 세운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곽태산은 그저 다른 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무슨 위약금이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입회할 때 계약서 안 읽어 봤어? 중도 이탈 시 위약금 조항 있는 거." 곽태산이 히죽 웃었다. 등잔불 그림자가 그의 광대뼈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네 부모 사인 다 받아 놨거든." 하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런 조항이 있었다고?〉 반년 전 입회 계약서까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때는 하린도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었다. 네 살짜리가 계약서를 검토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으니까. 전생의 습관이 몸에 새겨져 있어도, 그때는 이 몸이 너무 작고 어렸다. 글자도 제대로 못 읽던 나이였다. 부모님이 서명하는 손을 그저 올려다보기만 했었다. 그 종이가 지금 이렇게 목을 조여올 줄은 몰랐다. "위약금이 얼만데요." 하린이 겨우 물었다. 곽태산은 대답 대신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이거보다 한 자릿수 더 붙는다고 생각하면 돼." 숫자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모르는 숫자는 늘 실제보다 크게 느껴졌다. "네 아버지 벌이로 감당 안 될 거다." 곽태산이 종이를 소매 안에 밀어 넣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사흘 안에 찍으면 조용히 끝날 일이야." 등잔불이 다시 흔들렸다. 문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온 것도 아닌데, 불꽃이 제멋대로 일렁였다. 곽태산이 문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사흘이다." 문이 닫혔다. 쿵. 무거운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가 별채 안에 낮게 울렸다. 하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손목이 욱신거렸다. 숨을 몰아쉬는데 목구멍이 타는 듯 따가웠다. 심장이 늑골 안쪽을 두드리듯 쿵쿵 뛰었다. 〈사흘 안에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부모님한테 말해야 하나. 하지만 부모님이 이미 서명한 종이라면, 말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협회에 신고를 해야 하나. 신고를 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방금 그 계약서는 곽태산이 도로 소매 안에 넣어 가 버렸다. 증거도 없이 뭘 어떻게 신고한단 말인가. 머릿속이 온통 뒤엉켰다. 전생의 기억은 이럴 때 필요한 답을 주지 않았다. 계약서의 허점을 찾아내는 눈은 있어도, 이 상황 전체를 뒤집을 방법은 알지 못했다. 어둑해진 별채 안에서, 하린은 혼자 손목을 문지르며 앉아 있었다. 벌겋게 남은 손자국 위로, 식은땀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곽태산의 것이 아니었다. 더 가볍고, 더 빨랐다. 누군가 별채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