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강사님, 그 피는 못 드려요

3화

하린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장의 나뭇결무늬를 세다가, 다시 처음부터 세다가, 결국 포기했다. 이불 속에서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벌겋게 남은 자국이 아직도 욱신거렸다.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 보니 통증이 찌릿하게 올라왔다. 〈사영계약서, 위약금 조항, 사흘.〉 세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빙글빙글 돌다가, 서로 부딪히다가, 결국 하나로 뭉쳐져 명치를 짓눌렀다. 창밖이 서서히 밝아 왔다.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하린은 몸을 일으켰다. 다음 날 아침, 하린은 몰래 서고로 향했다. 저택 안쪽에 있는 작은 서고였다. 부모가 사업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라 평소엔 출입이 엄했지만, 오늘은 유모의 눈을 피해 숨어들었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벽에 등을 붙였다. 발소리가 날까 봐 까치발을 들었다. 네 살짜리 짧은 다리로 까치발을 드는 게 얼마나 우스운 꼴인지, 하린 스스로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체면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서고 문 앞에 서서 숨을 죽였다.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손잡이를 돌렸다. 끼익.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하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몇 초가 흘렀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가 사이로 손을 뻗어 서류함을 뒤졌다. 낡은 종이 냄새, 곰팡내 섞인 공기. 손끝에 먼지가 뽀얗게 묻어났다. 서류함 하나를 열자 오래된 계약서 뭉치가 나왔다. 날짜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하린은 손가락으로 날짜를 훑어 내려갔다. 작년 것, 재작년 것, 그보다 더 오래된 것. 반년 전 날짜를 찾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찾았다. 〈영술 수련 입회 계약서〉 반년 전 아버지가 서명한 종이였다. 하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종이를 펼쳤다. 종이 모서리가 손끝에 스치며 서걱, 소리를 냈다. 조항 열둘. 하나씩 눈으로 훑었다. 첫째, 둘째, 셋째. 대부분 수업 일정과 장소에 관한 평범한 문구였다. 하지만 아홉 번째 조항에서 눈이 멈췄다. 〈수련생이 육 개월 과정을 완료하지 못하거나 중도 이탈할 경우, 위약금으로 수업료 전액의 삼 배를 지불한다.〉 삼 배. 하린의 눈이 숫자를 다시 훑었다. 오백사십만 원짜리 약을 반년간 먹였으니, 그 비용만 해도 이미 억 단위였다. 매달 지불한 수업료에, 특수 약재비, 거기에 곽태산이 청구한 각종 부대비용까지 더하면. 삼 배면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가문 하나가 통째로 휘청거릴 액수였다. 〈하지만 나는 육 개월을 완료했다. 중도 이탈이 아니다.〉 하린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완료했다. 분명히 완료했다. 그런데 왜 사흘이라는 시한이 붙었을까. 하린의 눈이 다음 문장을 훑었다. 〈단, 삼속성 미만 각성 시 사영계약서 미체결은 중도 이탈로 간주한다.〉 숨이 턱 막혔다. 〈이거였구나.〉 손이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글자 하나하나를 다시 읽었다. 혹시 잘못 읽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뜻은 바뀌지 않았다. 일속성만 각성한 하린이 사영계약서를 거부하면, 협회 규정상 그건 '중도 이탈'로 처리된다. 그러면 위약금이 청구된다. 곽태산이 만들어 놓은 함정이 이거였다. 종이를 쥔 손이 떨렸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이건 내가 아니라 부모가 서명한 조항이다.〉 하지만 부모는 이 조항의 진짜 뜻을 몰랐을 것이다. 곽태산 같은 사람들은 늘 이런 식으로 문서를 짠다. 중요한 문장을 아홉 번째 조항, 눈에 잘 안 띄는 자리에 숨겨 놓고, 나머지는 평범한 말로 채운다. 서명하는 사람이 다 읽지도 않고 도장을 찍게 만드는, 오래된 수법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스쳤다. 비슷한 계약서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이런 식이었다. 아홉 번째, 열한 번째,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독을 숨겨 놓는 방식. 서고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쿵. 쿵.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였지만, 하린의 심장은 그보다 몇 배는 크게 뛰었다. 재빨리 종이를 서류함에 되돌려 넣었다. 서류함 뚜껑을 닫는 손이 미끄러졌다. 겨우 닫고서 서가 뒤로 몸을 숨겼다. 발소리가 서고 앞을 지나쳤다. 멀어졌다. 하린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시간이 없다.〉 협회에 직접 문의할 수도 없었다. 네 살짜리가 협회 사무소에 나타나면 그 자체로 의심을 산다. 설령 몰래 찾아간다 해도,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곽태산이 그걸 알고 사흘이라는 시한을 던진 거였다. 어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는 시간.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손끝이 다시 떨렸다. 이번엔 위약금 때문이 아니었다. 반년 전, 아버지 서준혁은 하린이 영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두말없이 곽태산을 초빙했다. 비싼 수업료를 듣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백사십만 원짜리 악약을, 하린이 힘들어할 때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밀어붙여 준 사람이었다. 약을 삼킬 때마다 하린의 등을 두드려 주던 손길이 아직도 생생했다. 어머니 강도희는 매번 결과가 나올 때마다 손을 꼭 잡아 주며 괜찮다고 말해 준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안 됐어도 괜찮아. 다음에 하면 돼."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 없었다. 그런데 겨우 일속성. 반년, 몇억 원어치 투자, 그 결과가 겨우 일속성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삼속성, 사속성도 흔했다. 하린만 유독 뒤처졌다. 〈이걸 말씀드리면 실망하실까.〉 〈아니, 이번엔 그것보다 더 큰 문제다. 위약금이다.〉 돈 문제였다. 가문의 명예도 아니고, 하린의 재능도 아니고, 순전히 돈 문제였다. 그것도 억 단위의 돈. 하린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네 살짜리 몸의 습관이 아니라, 전생부터 굳어 있던 버릇이었다. 위기 앞에서 항상 손톱부터 물어뜯었다. 전생에서도, 지금도. 서고 문이 벌컥 열렸다. 쾅. 하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가씨, 여기 계셨어요?" 유모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얼굴로 서고 안을 두리번거렸다. 하린은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치맛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낼 새도 없었다. "마님이 찾으세요. 곽 선생님이 아침 일찍 별채에서 나가셨는데, 얼굴이 안 좋으셨다고." 하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벌써 어머니 귀에 들어갔나.〉 "얼굴이... 안 좋으셨다고요?" 하린이 겨우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어제 곽 선생님하고 무슨 얘기 하셨는데." 유모의 눈이 하린의 손목으로 향했다. 소매 밑으로 살짝 드러난 벌건 자국. 하린은 얼른 소매를 끌어당겼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모는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어서 가요. 마님 기다리세요." 유모를 따라 걸으며, 하린은 발끝을 내려다봤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사흘 중 하루가 벌써 지나가고 있다.〉 사랑채로 향하는 복도가 그날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밑에서 마루가 삐걱거릴 때마다 심장이 따라 뛰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정원의 나무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오늘 안에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하린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복도 끝, 사랑채 문이 보였다. 문 너머에서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 아버지와 어머니,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평소와는 다른, 낮고 무거운 톤이었다. 하린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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