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서준혁은 그날 밤, 사람을 하나 불러들였다.
협회 쪽에 인맥이 있다는 지인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하린은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낮게 깔린 목소리와 발소리가 거실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
쿵.
하린은 몸을 일으켰다.
방바닥이 차가웠다.
발끝으로 조심스레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나무 문틈으로 노란 불빛이 실처럼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들어야 해.〉
하린은 문 옆에 쪼그려 앉았다.
등이 벽에 닿았다.
벽지가 눅눅했다.
숨을 죽이자 방 안의 목소리가 조금씩 또렷해졌다.
"곽태산이라면 나도 아는 이름이야."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그 웃음이 편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삼속성 보유자 맞긴 한데, 협회 내에서도 말이 많아. 몇 년 전에 사기 전과가 있었다는 소문도 있고."
하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전과.〉
손끝이 저절로 말려들었다.
곽태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심되기보다는 속을 더 뒤틀어 놓았다.
"학생들한테 사영계약서 들이민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얘기도 있어. 다른 집안에서 조용히 무마된 사건도 몇 건 있고."
"조용히?"
서준혁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문틈으로 보이는 그의 옆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돈 있는 집들이라 시끄러워지는 걸 싫어했으니까. 위약금 몇 배 물어 주고 그냥 덮은 거지. 협회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한 사람은 아직 없어."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이 길었다.
하린은 문 옆에 쪼그려 앉아 숨을 죽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
쿵. 쿵.
〈다른 피해자가 있다.〉
곽태산이 이 짓을 처음 하는 게 아니었다.
반년에 걸쳐 학생을 몰아붙이고, 겨우 일속성이나 이속성 각성시켜 놓고, 삼속성 이하는 실패자 취급하며 사영계약서로 옭아매는 방식.
한 집안이 아니라 여러 집안에서 반복된 수법이었다.
같은 미끼, 같은 압박, 같은 결말.
〈이게 협회 연줄로 덮여 왔다는 거지.〉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쇠맛이 났다.
피 맛인지 침 맛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방 안에서 강도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협회에 이 사람 배경 봐줄 사람 있어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평소의 부드러운 어조와는 완전히 다른 결이었다.
"있긴 한데, 그쪽도 곽태산이랑 얽혀 있을 가능성이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
서준혁이 낮게 말했다.
"조심스럽게 갈 시간이 없어. 사흘 준다고 했으니까."
"이틀 남았지, 이제."
하린은 문 뒤에서 손끝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이틀.〉
숫자가 다시 목을 조여 왔다.
시간이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했다.
사흘이 이틀이 되고, 이틀이 하루가 되고, 그다음엔.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방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서류를 뒤적이는 듯했다.
서걱.
서걱.
"이 계약서, 조항이 이상해. 위약금 조항이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가."
낯선 남자가 중얼거렸다.
"네 살짜리가 이걸 짚어냈다고?"
"어."
서준혁의 대답이 짧았다.
짧은 만큼 무게가 있었다.
침묵이 잠시 흘렀다.
문틈 너머로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 아이, 좀 무섭네."
하린은 그 말에 숨을 멈췄다.
칭찬인지 걱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목구멍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
쾅.
서준혁이었다.
문을 연 그의 손이 문고리를 그대로 잡고 있었다.
하린은 화들짝 물러서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엿듣고 있었어?"
목소리가 낮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대답 대신 하린은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혼날 줄 알았다.
아빠라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순간에 화를 냈다.
적어도 예전 삶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서준혁은 몸을 낮춰 하린과 눈을 맞췄다.
무릎을 굽히는 소리가 났다.
여우 같은 웃음이 아주 살짝 돌아와 있었다.
"괜찮아. 이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제 일인데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말해 놓고 나서야 하린은 자신이 뭘 내뱉었는지 깨달았다.
"네 일이지만, 어른이 처리할 일이야."
서준혁이 하린의 어깨를 짚었다.
손끝이 따뜻했다.
그 온도가 낯설었다.
"네가 손목 다친 자국 보고, 계약 조항까지 짚어낸 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네 몫을 했어."
하린은 그 말에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눈두덩이 뻐근했다.
〈믿어 준다는 게 이런 거였나.〉
네 살짜리가 계약서를 읽어 냈다는 걸, 부모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상하다고 캐묻지도 않았다.
그냥, 그랬구나, 하고 넘어갔다.
그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안심도 잠시였다.
강도희가 방 안에서 나오며 말했다.
표정이 딱딱했다.
"곽태산 쪽에 사람을 심어야 해요. 다른 피해 학생을 먼저 찾아야 증거가 돼요."
"위험할 수 있어."
"위험하지 않은 방법이 어딨어요, 지금."
강도희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서준혁이 그 말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하린은 마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 너머로 대문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담벼락을 비추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대문 밖으로 그림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사람인가.〉
하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숨을 멈춘 채 시선을 고정했다.
그림자는 담벼락을 따라 움직이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죽인 움직임이었다.
익숙한 사람이 걷는 방식이 아니었다.
낯선 발소리가 대문 밖에서 잦아들었다.
그것마저 사라지고 나서야 하린은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하린의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아까 서준혁의 손이 짚었던 그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곽태산이 벌써 사람을 붙였다.〉
이 집을 감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담 너머에서 이 집의 불빛을 세고 있을지 몰랐다.
남은 시간은 이틀이었다.
그리고 그 이틀 사이, 곽태산이 무슨 짓을 벌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린은 창문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어둠이 가라앉은 담벼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