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6세 몸으로 버티기로 했다

1화

양평 자택 정원엔 달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강도현은 마루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십이 년을 살아온 몸이었다. 관절 마디마디가 저녁 습기에 반응해 뻐근했다. 무릎 뒤쪽부터 시작된 저림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젊었을 때는 몰랐던 통증이었다. 이제는 매일 밤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그는 잔을 채우고 다시 비웠다. 소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싼 술이었다. 비싼 걸 마실 이유가 없었다. 내일이면 다 끝날 일이었다. '은퇴 신고서, 내일이면 끝이다.' 삼십 년을 국가에 바친 세월이었다. 작전과 훈련과 매복. 셀 수 없는 밤을 남의 나라 산속에서 보냈다. 이제는 이 작은 정원 하나면 충분했다. 소나무 세 그루, 잔디 마당, 마루 하나.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잔을 비우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없었다. 원래라면 이맘때쯤 북쪽 하늘에 별자리가 선명하게 보여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대신 하늘 한복판에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가장자리가 붉게 타올랐다. 마치 하늘에 난 상처 같았다. 강도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저건.' 술기운 때문인가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구멍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위이이잉. 공기가 진동했다. 귀속이 먹먹해지는 낮은 울림이었다. 몸속 뼈까지 떨리는 느낌이었다. 정원의 소나무가 옆으로 휘청였다. 가지 끝에 매달린 이파리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흙바닥이 갈라지며 붉은 균열이 솟아올랐다. 균열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새어나왔다. 지열도 아니고 화기도 아닌, 이상한 냄새가 섞인 열기였다. 썩은 고기 냄새와 쇠 냄새가 동시에 코를 찔렀다. 강도현은 몸을 낮추고 마루 밑으로 굴렀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삼십 년 넘게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퇴역해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마루 밑 그늘에 몸을 숨긴 채, 그는 숨을 죽였다. 먼지 냄새와 젖은 흙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쿵. 무언가 정원 한가운데 떨어졌다. 땅이 크게 울렸다. 마루 판자가 들썩였다. 강도현은 판자 틈으로 정원을 살폈다. 키가 이 미터는 되는 검은 형체였다. 몸통은 사람의 형태를 흉내 낸 것처럼 보였지만, 관절이 지나치게 많았다. 팔꿈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 두 개, 세 개. 피부라기보다는 타르처럼 끈적한 어둠이 형체를 감싸고 있었다. 눈알이 없는 자리에 붉은 빛이 두 개 박혀 있었다. 빛은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일정한 간격으로 맥동하듯 밝기가 변했다. 형체는 고개를 돌려 강도현을 찾았다. 목이 통째로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인간의 관절 구조로는 불가능한 각도였다. 강도현은 등줄기에 소름이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씨발."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마루 밑을 빠져나왔다. 손에 잡히는 건 정원 손질용 갈퀴 하나였다. 무기라 할 수도 없는 물건이었다. 갈퀴를 쥔 손이 떨렸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총 한 자루 없이 이런 걸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베테랑이라는 이름이 무색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그냥 늙은 몸뚱이 하나를 가진 인간이었다. 형체가 달려들었다. 쐐애액. 팔이 아니라 낫처럼 휘어진 뼈가 허공을 갈랐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강도현은 몸을 비틀며 피했다. 발끝에 힘을 주고 몸의 중심을 낮췄다. 오래된 반사 신경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어깨가 스치듯 베였다. 옷감이 서걱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뜨거운 통증이 늦게 따라왔다. 피가 흘러 옷을 적셨다. 따뜻한 액체가 팔뚝을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낯설었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종류의 통증은. '하나가 아니었다.' 담장 너머에서 두 개, 세 개, 다섯 개. 검은 구멍에서 형체들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쿵, 쿵, 쿵. 땅이 연속으로 울렸다. 정원은 순식간에 붉은 균열과 검은 그림자로 가득 찼다. 소나무 사이사이로 붉은 눈빛들이 번뜩였다. 강도현은 등을 담벼락에 붙였다. 차가운 시멘트 벽이 등에 닿았다. 숨이 가빴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쿵쿵쿵쿵. 빠르고 불규칙한 박동이었다. 오십이 년 인생 마지막이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침대에서 조용히 눈을 감을 줄 알았다. 아니면 병원 침상 위에서. 정원에서, 이름도 모를 괴물들에게 찢겨 죽는 결말은 상상해본 적 없었다. "이봐."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목소리가 떨렸지만 애써 눌러 담았다. "이게 다야?" 형체 하나가 낫을 들고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두 마리가 동시에 좌우에서 몸을 낮췄다. 협공이었다. 짐승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것들이 전술을 짤 줄 안다는 게 소름 끼쳤다. 서걱- 강도현은 갈퀴로 낫을 받아냈다. 충격이 손목을 타고 어깨까지 전해졌다. 손목이 통째로 저렸다. 갈퀴가 반으로 부러졌다. 부러진 쪽 끝이 형체의 목을 스쳤다. 푸시익. 검은 액체가 뿜어졌다. 썩은 계란 냄새가 진동했다. 형체가 뒤로 물러났다. 비틀거리며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건 시간을 번 것뿐이었다. 남은 넷이 동시에 움직였다. 강도현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무릎이 저절로 접혔다. 예전 몸이었다면 버텼을 힘이었다. 이십 대의 강도현이었다면 이 정도는 웃으면서 상대했을 것이다. 지금 이 몸은 예전이 아니었다. 오십이 년 세월이 근육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었다. 관절은 뻐근했고, 폐는 금방 숨이 찼다. '여기서 끝인가.' 부러진 갈퀴 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것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형체 넷이 좁혀왔다. 각자 다른 방향에서, 다른 속도로. 강도현은 시선을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 쪽을 먼저 상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나는 막을 수 있다. 둘은 어렵다. 넷은...' 낫 하나가 정확히 목을 향해 떨어졌다. 날 끝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때였다. 눈앞에 회색 빛이 번쩍였다. 시야 전체가 흐릿한 회색으로 물들었다. 낫이 코앞에서 멈춘 것처럼 느려졌다. 시간이 늘어난 것 같았다.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끈적한 물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굳어졌다. 강도현의 시야에 처음 보는 문자들이 떠올랐다. 허공에 새겨진 것처럼, 눈앞에 선명했다. 【 고객님께 긴급 프로모션을 제안드립니다. 】 피가 튀는 정원 한가운데서, 낫이 목젖 앞 삼 센티미터에 걸려 있는 채로. 강도현은 그 문장을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죽음이 삼 센티미터 앞에 걸려 있는 상황에서, 눈앞에 뜬 건 상업적인 문구였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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