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저택 안이 소란스러웠다.
하은이 밤새 열이 올라 앓아누웠기 때문이었다. 유모가 다급히 뛰어다니며 찬 물수건을 나르고 있었다. 복도를 오가는 발소리가 평소보다 배는 빨랐고, 하녀들은 물동이를 든 채 서로 부딪치지 않으려 몸을 비틀며 뛰어다녔다.
"어제 정원에서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유모가 윤서연에게 보고했다. 손에 든 물수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윤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의사는 불렀어?"
"지금 오고 있습니다."
"체온은?"
"조금 전에 재보니 삼십구 도가 넘었습니다."
윤서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그녀의 표정은 이미 결심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녀는 곧장 하은의 방으로 걸어갔고, 그 뒷모습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머니라는 자리가 그녀에게 요구하는 태도가 무엇인지, 저 몸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아린은 복도 끝에서 그 소란을 지켜보았다. 하은의 방문이 열려 있었고, 침대에 누운 작은 몸이 이불 속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발이 이따금 움찔거렸다. 그 옆에는 낡은 토끼 인형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는데, 귀 한쪽이 해져서 실밥이 드러나 있었다.
'내 탓일까.' 그런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아린은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원인을 따지는 것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먼저였다. 전생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무너진 것을 붙들고 후회하는 시간은 그 무엇도 되돌리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상황을 읽어야 한다. 그다음에 움직여야 한다.' 오래전 어느 전장에서 그에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준 이가 그렇게 말했었다. 감정이 앞서면 판단이 무뎌진다고.
의사가 도착해 진맥을 짚었다. 손목을 짚은 손끝이 몇 번이나 오갔고, 눈꺼풀을 들어보고 입안을 살피는 과정이 이어졌다.
"단순한 몸살입니다. 며칠 쉬면 나을 겁니다." 의사가 말했다. "다만 마음이 편치 않으면 열이 쉽게 오르내리니, 되도록 안정을 취하게 해주십시오."
그 말에 저택 안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유모의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고, 복도를 오가던 하녀들의 발걸음도 느려졌다. 하지만 윤서연은 하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의사가 돌아간 뒤에도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딸의 이마를 짚은 손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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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은 부엌으로 내려가 조용히 하녀들 사이에 섰다. 예전 같으면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 자리였지만, 지금은 필요한 정보가 그곳에 있었다. 부엌은 저택에서 가장 많은 말이 도는 곳이었고, 그 말들 속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실이 섞여 있었다.
"아가씨가 요즘 밥을 잘 안 드셨다면서요." 한 하녀가 다른 하녀에게 말했다. 손으로는 무를 썰면서도 입은 쉬지 않았다.
"그럼요. 새 아가씨 오시고 나서부터 계속 저러셨잖아요." 다른 하녀가 답했다. "토끼 인형도 밤마다 끌어안고 우신다던데."
"저도 들었어요. 예전엔 안 그러셨는데."
"사실 그전부터 좀 이상하셨어요. 마님이랑 사장님이 던전 들어가시는 날이 늘면서부터. 아가씨가 유모한테 언제 오냐고 자꾸 물으셨거든요."
"그건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른 것 같아요. 자기가 없어져야 다들 좋아질 거라는 식으로."
아린은 그 대화를 놓치지 않고 새겼다. '하은의 불안이 오래전부터 쌓여왔다는 뜻이다.' 단순히 자신이 온 것이 원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짚어냈다. 부모의 관심이 던전 탐험으로 자주 비는 시기와, 아린의 등장이 겹쳐 폭발한 것이었다. 하나의 불씨가 아니라, 오래 쌓여온 마른 장작 위에 던져진 성냥 한 개비였을 뿐이었다.
'문제의 뿌리는 내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정리했다. '하지만 내가 그 불씨가 된 것도 사실이다.' 두 가지 사실 모두 인정해야만, 다음 걸음을 옳게 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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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어 하은의 열이 조금 내렸다. 이불이 들썩이던 것도 잦아들었고, 숨소리도 한결 고르게 변했다. 아린은 문 앞에서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윤서연이 하은의 이마를 짚으며 낮게 말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어디 안 가. 걱정하지 마."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자신을 향한 다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마치 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처럼 들렸다.
하은이 눈을 뜨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저 애 데려가면 안 돼?"
윤서연의 손이 멈췄다.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방 안에는 잠시 시계추 소리만 울렸다. 그 짧은 정적이 무엇보다 무겁게 방 안을 채웠다.
아린은 그 순간 문 앞에서 조용히 돌아섰다. 그 말이 예상보다 더 무겁게 가슴을 눌렀다. 여섯 살짜리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너무도 명확한 요구였다. 그것은 어리광이 아니라, 오래 생각해온 결론처럼 들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하은이 아픈 것도, 저택의 공기가 무거운 것도, 근본적인 해결 없이는 계속될 문제였다.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나아지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방치하면 곪아 터질 상처였다.
아린은 복도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유모의 손이 아니라, 부모의 말이 필요하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물수건이나 약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확답이었다. 그리고 그 확답은, 지금의 애매한 위치에 있는 자신이 사라져야만 완전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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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강태준이 아린을 서재로 불렀다.
서재는 조용했다. 책상 위에는 서류 몇 장이 흩어져 있었고, 창밖으로는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 있었다.
"하은이 낮에 뭐라고 했는지 들었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들었습니다." 아린이 답했다.
강태준은 잠시 침묵했다.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두드리는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톡, 톡, 톡. 그 소리가 멈추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연도 알고 있다. 하은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강태준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도 못 하더군. 부모로서 참담한 일이지."
"이해합니다." 아린이 답했다.
"내일 저녁, 가족 회의를 열겠다." 그가 말했다. "너와 서연, 하은, 나 넷이 모여서 이 일을 정리한다."
"회의라 하시면." 아린이 물었다.
"네가 어제 한 제안. 그걸 정식으로 논의하겠다는 뜻이다." 강태준의 눈빛이 진지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됐으니까. 하은이 그런 지경까지 갈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쉬운 결정이 아니다." 강태준이 덧붙였다. "네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야. 서연은 아직도 반대가 강해."
"압니다." 아린이 답했다. "그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 강태준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너답구나."
그 말에는 비웃음도, 칭찬도 아닌, 어떤 인정이 섞여 있었다. 아린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재를 나서는 아린의 발걸음은 담담했지만, 마음속에는 팽팽한 긴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일이 분수령이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예감했다. 어느 쪽으로 기울든, 이 저택의 공기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었다.
복도를 지나던 중, 하은의 방문 앞에서 유모와 마주쳤다. 유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같으면 아린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부터 건넸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아가씨가 아까부터 이상한 말을 하시네요." 유모가 낮게 속삭였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다들 불행해졌다고, 자기가 없어지면 다 좋아질 거라고..."
"...열 때문에 헛소리를 하시는 걸까요?"
아린의 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단순한 열병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직감했다. 하은의 마음속에 쌓인 것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위태롭다는 뜻이었다. 몸의 열은 며칠이면 내리겠지만, 마음의 열은 그렇게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었다.
내일의 가족 회의는 이제 단순한 신분 정리의 자리가 아니게 되었다. 하은의 마음을 붙잡을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아린은 굳게 닫힌 하은의 방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문 너머로 희미한 흐느낌 같은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결전의 시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