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명의 전직 구원자

5화

눈을 뜬 곳은 색이 없는 공간이었다. 하늘도 땅도 구분되지 않는 회백색 안개 속에서,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추락하는 감각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수조 안에 떠 있는 것처럼 몸이 가볍게 부유했고, 숨을 쉬어도 공기가 폐로 들어오는 느낌조차 없었다. '죽은 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이게 죽음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는 사실이 새삼 웃겼다. 10년을 이 바닥에서 굴러먹었으면서도 정작 죽는 순간의 감각 하나 예측 못 하고 있다니, 던전 매뉴얼에도 이런 건 안 적혀 있었다. 안개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다가온 건 김도윤이었다. 그는 늘 그랬듯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픽 웃었다. "또 무모한 짓을 했군, 대장." 그 말투가 너무나 그대로여서 나는 헛웃음이 터졌다. 웃음소리가 안개 속으로 흩어지는 걸 느끼며 다시 정신을 차렸는데, 이 자식은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똑같은 잔소리를 하는구나 싶어 오히려 안심이 됐다. 죽어서까지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 "넌 안 늙었냐." 내가 그렇게 되받자 김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선 다 그대로야. 늙는 것도 사치지." 그 말이 왠지 서글프게 들렸는데, 생각할 틈도 없이 뒤이어 박서은이 활을 어깨에 걸친 채 나타나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엔 잔해에 깔리지 말아요." 그녀 특유의 무뚝뚝한 걱정이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여자가 저런 말투로 신경 써주는 걸 보면, 사람은 죽어서도 성격을 못 버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괜히 목덜미를 긁적이며 "노력은 해보지"라고 대답했는데, 박서은은 그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저 표정 하나만으로도 십 년치 잔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정우진은 여전히 지친 얼굴로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저 인간은 살아 있을 때도 피곤에 절어 있었는데, 죽어서도 저 얼굴이라니, 사후 세계에도 야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오철중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히어로물 흉내를 내며 포즈를 잡았는데, 그 모습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이 상황에서도 저러고 있다니.' 죽어서까지 저런 오글거리는 포즈를 유지하는 근성 하나는 인정해줘야 했다. 살아 있을 때 저 포즈를 볼 때마다 등짝을 후려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여울은 초등학생 같은 외형 그대로 마법소녀 흉내를 내며 폴짝 뛰어올랐고, 700살이 넘는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몸짓이었다. 저 조그만 몸으로 수백 년을 살았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났는데, 안개 속에서도 여전히 깡총거리는 걸 보니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한서리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결국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서연한테 잘해. 이번엔 진짜로."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조여왔다. 한서리는 살아 있을 때도 이서연 이야기만 나오면 저런 표정을 지었다. 걱정과 원망이 반쯤 섞인, 그러면서도 결국은 잘되길 바라는 눈빛. 나는 뭐라 대답하려다가 목이 막혀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안개 속에서도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곤란한 일일 줄이야. 최준혁과 강태식, 임재현이 차례로 짧게 인사를 건넸다. 최준혁은 특유의 무뚝뚝한 손짓으로, 강태식은 씩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고, 임재현은 그저 고개를 살짝 숙였을 뿐이었지만 그 침묵 속에 담긴 뜻을 모를 만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셋 다 짧게 왔다가 안개 속으로 스러지듯 사라졌는데, 그 짧은 순간들이 오히려 더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개 가장 깊은 곳에서 묵영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공간의 비현실성을 다시 한번 일러주었다. 그는 늘 그랬듯 표정 변화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감을 열어라. 이번엔 늦지 않게." 그 말과 동시에 내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10년간 쌓아온 모든 경험과 감각이 한꺼번에 응축되어 새로운 형태로 재조립되는 듯한 감각이었는데, 뼈마디 하나하나가 녹아내리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새로 벼려지는 것 같은, 뭐라 형용하기 힘든 이중의 통증이었다. '이게 각성인가.' 나는 그 낯선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살아오면서 온갖 부상과 고통을 겪어봤지만 이런 종류의 감각은 처음이었다. 몸 안의 모든 세포가 동시에 아우성치는데, 그 아우성이 통증이 아니라 어떤 각성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아플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묵영은 여전히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저 인간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감정 표현에 인색하구나 싶었는데, 그 무표정 속에서도 뭔가 걱정 비슷한 게 스치는 걸 본 것 같아서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려는 순간, 아주 희미하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는 결이 다른, 따뜻하면서도 슬픈 음성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도현." 이서연의 목소리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과 동시에 온몸의 신경이 그 목소리 하나에 집중되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손끝이 안개에 닿는 순간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저항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지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안개는 오히려 더 짙어지며 나를 밀어내는 듯했다. "서연아!" 나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소리조차 안개 속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이렇게 답답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던전 안에서 동료가 위험에 처했을 때 느꼈던 그 무력감과 비슷하면서도, 이번엔 더 근원적인 무언가가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안개가 이미 완전히 걷히며 시야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기다려, 서연아.' 속으로 외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대로 의식이 현실로 끌려 올라가는 감각이 전신을 관통했다. 마치 깊은 물속에서 수면 위로 강제로 끌어당겨지는 느낌이었는데,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눈을 뜨자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하얗게 번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병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고, 옆에서 모니터 삐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그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에 나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천장 타일의 무늬까지 눈에 들어올 만큼 정신이 또렷했는데, 몸은 여전히 물속에 잠긴 것처럼 무거웠다. 하늘의 얼굴이 시야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내 몸에 연결된 모니터를 돌아보았다. 그 표정 변화가 어찌나 빠르던지, 방금까지 안도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경계로 바뀌는 걸 보며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화면 속 그래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삐 소리의 간격이 점점 빨라지더니, 곧이어 병실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협회 마크가 박힌 요원들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대여섯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 순식간에 병실을 채웠고, 그들의 장비에서 나는 금속 마찰음과 발걸음 소리가 병실 안에 어수선하게 울렸다. 선두에 선 요원이 무전기에 낮게 속삭이는 말이 똑똑히 귀에 박혔다. "타겟 각성 확인, 등급 재산정 필요. 격리 병동으로 즉시 이송." '각성 확인이라니,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방금까지 안개 속에서 느꼈던 그 뜨거운 감각이 아직 몸 안에 잔재해 있는 듯,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목에 감긴 낯선 금속 밴드가 눈에 들어온 순간,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등골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걸 느꼈다. 밴드는 은색이었는데 표면에 푸른빛의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천천히 명멸하고 있었다. 이런 물건을 병원에서 본 적은 없었다. 협회에서도 이런 걸 쓰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 이건 단순한 의료 장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게 뭡니까." 나는 하늘을 향해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요원들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협회 마크를 단 요원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손에 든 태블릿을 확인하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분은 지금부터 격리 대상입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격리라니, 내가 무슨 바이러스라도 됩니까." 나는 애써 여유로운 척 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요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요원들에게 손짓을 했고, 그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병실 안의 장비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손놀림이 어찌나 신속하고 정확한지, 이런 상황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늘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요원들의 눈치를 보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도 특유의 밝은 미소로 분위기를 풀었을 사람이,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손목에 감긴 밴드를 힘겹게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문양이 명멸하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마치 내 심장 박동에 맞춰 반응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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