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정장을 입은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위원회 산하 특별조사국, 정성민입니다."
명함에는 정말로 아무 로고도 없었다. 그냥 이름과 전화번호만 인쇄된, 이상하게 텅 빈 종이. 재질도 뭔가 이상했다. 종이 같은데 손끝에 닿는 느낌은 플라스틱처럼 미끈했다.
"위원회요? 그게 뭔데요?"
내가 묻자 정성민이라는 남자는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묘하게 연습된 것처럼 매끄러웠다.
"차차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저택 침입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뒤에서 정신을 잃은 두 남자를 요원들이 들것에 실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이런 일을 수십 번은 해본 사람들처럼, 손놀림이 익숙했다. 한 명은 심지어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콧노래가 나와? 사람 벽에 처박혀서 실려가는데?
거실 바닥에는 아직도 부서진 서재 문의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요원 중 한 명이 그걸 빗자루로 슥슥 쓸어 담았다. 청소까지 해주는 서비스인가. 명함에 청소업체라고 써도 믿겠다.
나는 다인을 흘끗 쳐다봤다.
다인은 소파에 얌전히 앉아서 정성민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에 아무 변화도 없었다.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자세가, 마치 면접 보러 온 사람 같았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게 더 이상한 거 같은데.
"저 서재에서 벌어진 일, 목격자 진술이 몇 개 들어왔습니다."
정성민이 수첩을 펼쳤다. 손글씨가 빽빽하게 적힌 페이지가 스치듯 보였다.
"책장이 공중에 떠올랐다, 사람이 벽에 날아가 부딪혔다···. 흥미로운 이야기더군요."
"그, 그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지진이 났다고 할까. 아니면 가스 폭발? 아니, 서울 한복판 저택에서 가스 폭발이 나면 책장만 떠오르고 끝날 리가 없잖아. 머릿속에서 온갖 거짓말 후보들이 떠올랐다가 곧바로 자멸했다.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했습니다."
나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다인아—"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다인이 나를 향해 짧게 시선을 던졌다. 그 눈빛에 뭔가 확신이 담겨 있었다. 숨기는 게 더 위험하다는 확신 같은 것. 나는 그 눈을 보면서 속으로 소리쳤다. 야, 그런 확신은 나한테 미리 말을 해주고 가져야 하는 거 아니냐.
정성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놀라움이 아니라, 오히려 뭔가를 확인했다는 표정.
"···그렇군요."
그는 수첩을 덮었다. 딸깍, 하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내가 끼어들었다.
"이 아이는 그냥 평범한—"
"평범하지 않다는 걸 지금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정성민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목소리는 여전히 사무적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날카로운 게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이런 대화를 반복해온 사람이, 이제는 감정을 섞을 필요조차 못 느낀다는 투였다.
"이준혁 씨. 향림그룹 이관우 회장의 손자이자, 이 아이의 법적 후견인."
그가 서류를 훑으며 말했다. 서류 뭉치가 꽤 두꺼웠다. 언제부터 나에 대해 저렇게 자세히 조사한 거지. 내 학점까지 적혀 있는 건 아니겠지.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생전에 어떤 연구를 하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연구요? 무슨 연구요?"
할아버지가 남긴 건 유산과 이 저택, 그리고 다인뿐이었다. 연구라니. 할아버지가 하신 일이라고는 골프와 등산, 그리고 가끔 서재에 틀어박히는 것뿐이었는데.
정성민은 대답 없이 서류철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오래된 책 표지였다. 가죽으로 장정된, 잠금장치가 걸린 두꺼운 책. 사진인데도 표지의 질감이 느껴질 것 같았다. 낡고, 축축하고, 뭔가 오래 묵은 냄새가 날 것 같은.
표지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언뜻 보기엔 고대 문자 같기도 하고, 자세히 보면 그냥 낙서처럼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형태였다.
"'지혜의 서'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뇨."
"그렇겠죠. 이관우 회장님도 끝까지 함구하셨을 테니까요."
정성민이 사진을 다시 집어넣었다. 서류철을 닫는 손놀림이 지나치게 정중했다.
"이 아이가 그 책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인의 손이 자기 가슴께의 은빛 쇠사슬을 살짝 만졌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항상 무표정하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아니요."
다인이 낮게 말했다.
"관련 있는 게 아니라, 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정성민은 그 침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저희가 여쭤보고 싶은 건 하나입니다."
정성민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넥타이가 흔들렸다. 아무 무늬도 없는, 그냥 검은색 넥타이였다.
"이 아이를 저희 쪽으로 데려가서 정밀 검사를 받게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데려가요? 어디로요?"
목소리가 커졌다.
"절대 안 됩니다."
내 목소리가 거실 벽에 부딪쳐 울렸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큰 소리였다. 요원 몇 명이 쓸던 빗자루를 멈추고 이쪽을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정성민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살짝, 아주 살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은요."
"아직은요?"
"위원회 정식 명령이 떨어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장 재킷의 주름이 신경 쓰였는지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요원들이 하나씩 저택을 빠져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요원 하나가 소파 밑에 떨어진 책장 조각 하나를 주워 들고 나갔다. 저게 증거물이 되는 건가. 우리 집 가구가 국가 기밀이 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성민이 문 앞에서 돌아섰다.
"참고로."
그가 덧붙였다.
"오늘 습격한 사람들, 저희 쪽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
말을 끊고, 그는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이 아까보다 훨씬 서늘했다.
"이 아이를 원하는 세력이, 저희 말고도 있다는 뜻입니다."
문이 닫혔다.
저택 안에 정적이 흘렀다.
밖에서 차 시동 소리가 두 번, 세 번 이어지다가 점점 멀어졌다.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소파 스프링이 낡았는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순간에 저 소리마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망했다."
입 밖으로 그 말이 저절로 나왔다.
다인이 옆에 앉으며 나를 흘끗 봤다.
"당황하셨습니까."
"당황이 아니라 그냥 절망이야."
"절망은 비효율적인 감정입니다."
"알아, 알아. 근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 말이 위로가 되는 줄 알아?"
"위로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게 더 상처야."
다인은 잠시 침묵했다. 창밖으로 요원들의 차량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듯 시선을 잠깐 돌렸다가, 다시 나를 봤다.
그러다가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존댓말이었는데, 그 말투가 이상하게 다정했다.
나는 순간 코끝이 시큰거렸다. 이 상황에, 이 와중에, 저런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풀어지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 말이.
"···그래. 그러자."
나는 다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다인은 그 손길에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그날 밤, 나는 저택 구석구석에 있는 창문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잠금장치를 점검했다. 이런 걸 언제 해봤다고.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경비 시스템이 다 알아서 해줬는데, 지금은 그 경비 시스템조차 오늘 습격에 뚫린 뒤였다. 다인은 내가 창문을 확인하는 동안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그 은빛 쇠사슬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뭔가를 계속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물어봐도 대답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두었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는 책장이 계속 공중에 떠 있었고, 그 책장 사이로 낯선 문자가 새겨진 가죽 표지의 책이 둥둥 떠다녔다. 잡으려고 손을 뻗으면 손끝이 스치기만 하고 자꾸 멀어졌다.
하지만 그 온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저택 대문 앞에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경비 카메라 화면 속에서, 그 사람은 대문 앞에 아주 오래전부터 서 있었던 것처럼 미동도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