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대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정장 차림도, 검은 옷도 아니었다.
청바지에 후드티,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어제 그 시커먼 세단에서 내렸던 요원들과는 정반대의 행색이라, 나는 순간 저 사람이 배달원인가 싶었다.
"어? 이준혁?"
나를 알아본 목소리가 먼저였다.
목소리에 반가움이 뚝뚝 묻어 있어서, 나는 반사적으로 경계했던 어깨를 슬쩍 내렸다.
돌아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강소라.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였던, 밝고 시끄럽고 항상 사고를 치던 그 애.
회비를 걷어놓고 술값으로 다 써버렸다가 회장한테 두 시간 동안 잡혀 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나.
"···강소라?"
"오, 맞네! 나 기억하네!"
소라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3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하나도 안 변했다.
아니, 변한 게 있긴 했다. 예전엔 항상 편의점 삼각김밥을 들고 다녔는데 이제는 카페 커피를 들고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발전했구나.
"여기 이준혁 니네 집이라고 들었는데, 진짜 여기 있었네. 신기하다."
들었다고?
누구한테?
나는 그 말을 놓치지 않았지만, 일단은 반가운 척부터 하기로 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어, 그게—"
소라가 말을 흐리며 눈을 굴렸다. 그 순간의 표정이 이상하게 낯익었다. 예전부터 뭔가 숨길 때 짓는 표정이었다. MT 장소 잡을 때 몰래 펜션 사장이랑 짜고 리베이트 받았을 때도 딱 저 표정이었지.
"우연이야, 우연! 근처 지나가다가."
···우연이라고 하는데 눈을 안 마주치잖아.
동공이 창밖으로, 대문 기둥으로, 다시 내 얼굴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했다.
누가 봐도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저택 안에는 아직도 어제 그 흔적이 남아 있었고, 나는 뭔가 정보라도 하나 더 얻고 싶은 심정이었다.
"밥 먹었어? 나 배고픈데, 저기 카페 가서 얘기 좀 하자."
소라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손아귀 힘이 예전 그대로여서, 나는 순간 대학교 축제 뒤풀이 자리로 끌려가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다인은 저택 안에서 여전히 검사 데이터를 정리하느라 바쁘다고 했으니, 잠깐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뭔가 두고 나온 느낌.
* * *
대학가 카페 본점.
예전에 소라와 자주 오던 곳이었다. 원두 냄새와 시나몬 향이 뒤섞인 공기, 창가 자리는 그대로였다.
테이블에 남아 있는 흠집조차 그대로인 것 같았다. 저기 저 낙서, 분명 소라가 커터칼로 새긴 거였는데.
"여기 진짜 안 변했다."
내가 중얼거렸다.
"그치? 나도 그래서 좋아해."
소라가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입가에 거품이 살짝 묻었는데, 그것도 3년 전과 똑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안 변하나.
한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졸업 후에 뭐했냐, 취업은 했냐, 결혼은 안 했냐 같은 것들.
소라는 졸업하고 이런저런 회사를 전전했다고 했다. 마케팅 회사, 스타트업, 심지어 잠깐 유튜브 채널도 운영했다고.
"근데 다 망했어."
"왜?"
"몰라. 나 원래 뭐든 오래 못 해."
그건 예전이랑 똑같네. 아니, 이 상황에서 취업 스토리를 이렇게 태연하게 늘어놓는 것도 신기했다.
그런데 대화 중간중간 소라의 시선이 자꾸 창밖으로 향했다. 마치 누군가를 경계하는 것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 슬쩍슬쩍 넘어가는 시선이 점점 잦아졌다.
"소라야."
"응?"
"솔직히 말해봐. 우연히 온 거 아니지?"
소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러다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걸렸네."
"뭐야, 진짜 무슨 일인데?"
소라가 목소리를 낮췄다. 카페 안 배경음악 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게.
"어제 너희 집에서 난리 났었지. 위원회 요원들 왔었고."
"그걸 어떻게—"
"나도 그쪽 사람이거든."
담담하게 말하는 그 표정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손에 들고 있던 컵의 온도가 갑자기 차게 느껴졌다.
"···너도 위원회야?"
"위원회 아니야. 다른 쪽."
소라가 손가락을 저었다.
"위원회랑 우리는 안 친해. 같은 걸 쫓지만 방식이 다르거든."
"같은 거? 그 지혜의 서인가 뭔가?"
소라의 눈이 커졌다.
"어, 벌써 그거 이름까지 알고 있어?"
"위원회에서 어제 말해줬어. 근데 뭔지 설명은 안 해줬고."
소라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그러곤 한참 나를 뜯어보듯 쳐다봤다. 마치 이 정보를 어디까지 풀어줘야 하나 계산하는 눈빛이었다.
"좋아, 내가 설명해줄게. 대신—"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밥은 니가 사는 거다."
"···지금 그게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지. 나 지금 무직이야."
···이 상황에서 밥값을 챙기는 애가 조직 소속이라니.
세상이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는 애가 저녁 메뉴를 걱정하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나.
"그래, 사줄게. 뭐 먹고 싶은데?"
"파스타. 저기 이태리집."
"···비싼 데네."
"조직 얘기 듣는 값이야."
기가 찼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정보가 더 중요했다.
"'지혜의 서'는 백 년도 더 된 물건이야."
소라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카페 안의 다른 손님들 눈치를 슬쩍 살피고 나서야 이어갔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계산을 압축해놓은 책이라고 알려져 있어. 근데 그 봉인이 풀리면—"
"풀리면?"
"세상이 뒤집혀."
너무 거창한 말이라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세상이 뒤집힌다니, 무슨 만화책에서 나올 법한 대사잖아.
그런데 소라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을 수가 없었다. 눈동자가 흔들리지도 않았다. 저 표정, 예전에 회비 사고 났을 때도 저렇게 진지했던 적은 없었는데.
"그 책을 다룰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한데, 그게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특정한 조건을 가진 아이들만 가능해."
"조건이라니?"
"태생이 인간이 아닌 아이들."
순간 다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새하얀 피부, 어딘가 인간 같지 않은 침묵, 그리고 검사 결과지에 찍혀 있던 이상한 숫자들.
"···그게 무슨 뜻이야?"
소라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눈빛에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준혁, 니가 데리고 있는 애. 이름이 다인이라고 했지?"
"어떻게 알아?"
"우리 조직이 오래전부터 그 아이를 주시하고 있었거든."
심장이 쿵 떨어졌다. 컵을 쥔 손에 힘이 저절로 들어갔다.
"주시라니, 무슨—"
"이관우 회장님이 왜 그 애를 양자로 들였는지, 궁금하지 않았어?"
소라가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카페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 조직에서는 그런 아이들을 '봉인체'라고 불러. 지혜의 서와 공명할 수 있는 특수한 존재들."
"공명이라니, 다인이랑 그 책이 무슨 관계야?"
소라는 대답 대신 커피를 다 마셔버렸다. 컵을 흔들어 얼음 소리를 짤막하게 내고는,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거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뭘 봐?"
"우리 조직에서 다인을 만나고 싶어해. 정확히는—"
소라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짧은 침묵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시험해보고 싶어해."
"시험? 무슨 시험을?"
"그 애가 진짜 봉인체인지, 아니면 그냥 특이한 능력을 가진 애인지."
나는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의자가 삐걱, 소리를 냈다.
"만약 시험을 거부하면?"
소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3년 만에 처음 보는, 완전히 낯선 표정이었다.
"그럼 위원회가 먼저 데려갈 거야. 그리고 위원회는, 우리보다 훨씬 덜 친절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위원회보다 덜 친절하다는 건 대체 어느 정도라는 건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라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한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벌써 왔대."
"뭐가?"
소라가 창밖을 가리켰다.
대학가 도로에, 검은 세단 세 대가 정차하고 있었다. 어제 저택 앞에 서 있던 것과 똑같은 차종이었다.
차량 문이 동시에 열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은 하나같이 절도 있었다. 마치 훈련받은 것처럼.
카페 안 사람들은 아무도 그 이상한 광경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나와 소라만이 창문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소라야."
"응."
"저거 니네 쪽이야, 아니면 위원회 쪽이야?"
소라의 대답이 나오기까지, 이상하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