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저기, 잠깐만—" 나는 다급히 손을 뻗어 박도현의 어깨에 매달린 영석을 낚아채려 했지만, 그는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저건 실시간이야. 내 채널 다 보고 있었을 거야, 방금 그거." 그의 목소리에는 조롱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걸 느꼈다. 실시간이라니. 조금 전 내가 존댓말을 다 벗어던지고 저 남자의 팔을 꺾으며 목을 꺾어놓겠다고 협박하던 그 장면이, 사만 명이 넘는 사람들 눈앞에 고스란히 흘러갔다는 뜻이었다.
머릿속으로 방금 전의 장면을 다시 재생해보았다. 팔이 부러질 듯 꺾이는 소리, 그 소리에 맞춰 흘러나온 내 목소리, 억양까지 낮게 깔려서 마치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던 그 협박. 그걸 사만 명이 봤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몬스터한테 물어뜯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건 순전히 창피함의 문제였다. 백조라는 이름으로 우아하게 방송하겠다고 다짐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는데, 지금은 그 우아함이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영석 위에 뜬 채팅창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글자들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는데, 정확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방금 저 여자 누구야', '드레스 입고 저 짓을?', '혈아 팔 진짜 꺾인 거 아니야ㅋㅋㅋ', '이거 합성 아니냐 너무 매끄러운데', '목소리 완전 딴사람인데 더빙이야?', '저 리본 뭐야 코스프레야?'. 나는 그 문장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으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합성이라니, 지금 방금 내가 실제로 저지른 일을 두고 사람들이 합성이라고 의심한다는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저 정도 반응이면 아직 내가 누구인지까지는 알아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채팅창이 계속 흐르는 걸 보고 있자니, 마치 예전에 인터넷 방송을 보면서 낄낄거리던 시절이 떠올랐는데, 그때는 내가 저 화면 속 주인공이 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박도현이 몸을 일으키며 팔목을 주무르다가, 나를 힐끔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 방금 그거, 진짜 배신자야? 랭킹에 이름 하나도 없는데."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과 통증이 섞여 있었고, 팔목을 문지르는 손길이 어색하게 느려졌다. 나는 그 질문에 뭐라 답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아까까지의 거친 태도를 이어가야 할지, 원래의 우아한 화법으로 돌아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몇 가지 답변이 떠올랐다가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네, 배신자입니다, 근데 랭킹은 아직 안 등록했어요' 같은 대답은 너무 솔직해서 안 되고, '아니요, 저는 정의로운 시민입니다' 같은 대답은 방금 팔을 꺾은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어색하게 말투를 다시 다듬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저 지나가던 배신자랍니다. 위험한 상황을 방치할 수 없어서 개입했을 뿐이에요." 그 말이 스스로도 어색하게 들려서, 나는 속으로 얼굴을 붉혔다. 지나가던 배신자라니, 그런 수식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박도현은 그 어색한 존댓말과 방금 전의 거친 반말 사이의 간극을 느꼈는지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굳이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뭔가 계산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시선이 드레스 자락에서부터 흙탕물이 튄 구두, 그리고 손목에 반쯤 풀린 리본까지 훑고 지나갔다. 나는 그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물기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나는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몸을 돌려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그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어쩌면 이름을 물었을지도, 혹은 다시 만나자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나는 못 들은 척하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이힐이 아니라 그나마 발목까지 오는 부츠형 구두였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 상황에서 하이힐이었다면 벌써 두 번은 넘어졌을 것이다.
심장이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는데, 그건 방금 전의 흥분이 아니라 뒤늦게 몰려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팔을 꺾으면서 내뱉었던 말들, 그 살의에 찬 목소리, 나조차 낯설었던 그 폭력성. 그게 사만 명이 넘는 사람들 눈앞에 그대로 노출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뱃속을 뒤틀어 놓았다. 통로를 걸으며 나는 자꾸만 그 순간을 되짚었다. 팔을 꺾을 때 느껴졌던 뼈의 저항감, 그 손끝의 감촉이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몇 번이나 손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그런다고 사라질 감촉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귀환석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을 때, 나는 숨을 헐떡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등을 타고 스며들어 오는 게 오히려 반가웠다. 드레스 자락은 흙탕물로 얼룩져 있었고, 리본을 다시 손목에 감으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리본을 매는 손이 세 번이나 매듭을 놓쳤는데, 평소라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순간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봉인석이 깨지고 몬스터가 쏟아졌다면 더 많은 사람이 위험해졌을 텐데, 다행히 봉인석 자체는 깨지지 않았지만, 표면에는 실금 같은 미세한 균열이 하나 늘어나 있었다. 아직은 기능에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처음과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우아하게 존댓말을 유지하며 대처할 방법 같은 게 있었을 리 없었다. 우아함과 생존이 동시에 성립하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게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이미 몇 번이고 배운 참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려 했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것도 별 소용이 없었는데, 머릿속에서는 채팅창의 문장들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성 아니냐는 말이 자꾸 맴돌았다. 사람들이 내가 저지른 짓을 두고 진짜인지 아닌지 논쟁을 벌인다는 게, 어쩐지 씁쓸하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두 사람으로 쪼개진 것 같았다. 하나는 우아한 척 존댓말을 쓰는 백조, 다른 하나는 방금 살의를 드러내며 팔을 꺾은 정체불명의 여자. 어느 쪽이 진짜냐고 묻는다면, 나조차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귀환석 위에 올라서서 빛에 몸을 맡기려는 순간,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화면을 확인했는데, 알림이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씩 연속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진동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게, 마치 폰이 화가 나서 발버둥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내 채널 '백조'의 이름이 여러 커뮤니티 링크에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조회수라는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숫자를 읽는 순간 눈을 몇 번이나 다시 깜빡였다. 어제까지 0이었던 그 숫자가, 지금은 여섯 자리로 바뀌어 있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스크린샷이 벌써 몇 개나 돌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영석의 팔을 꺾는 순간을 정지 화면으로 잡아낸 것이었다.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 펄럭이고, 표정은 낯설도록 차가웠다. 그 아래 달린 댓글은 하나같이 정체를 궁금해하는 물음표로 가득했다. 나는 그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통로 저편에서 박도현이 아닌 다른 실루엣이,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귀환석이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