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리고—
태호는 눈을 감았다. 단전 깊숙한 곳에서 검은 실이 진기의 흐름을 타고 파고드는 그 서늘한 감촉을,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밀어내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안전이란 결국 또 한 번의 좌절, 또 한 번의 실패로 되돌아가는 길이었으며, 그것은 태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덟 해를 살아오며 그가 배운 것이 있다면, 세상은 안전한 자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삼켜야 한다. 삼켜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덟 살 소년의 결심치고는 지나치게 담대한 것이었으나, 그 순간 태호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기이한 평온만이 감돌았다.
밤바람이 공터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고,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아득하게 울렸다. 그 평범한 밤의 소리들이, 지금 이 순간 태호의 단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묘하게 느껴졌다.
쿠구구구—
검은 실이 단전 중심부로 파고드는 순간, 태호의 전신이 활처럼 휘었다. 뼈마디마디가 뒤틀리는 듯한 격통이 척추를 타고 뇌리까지 치솟았고, 혈맥이 통째로 터져나갈 듯한 압박감에 숨이 턱 막혔다. 목구멍 안쪽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흘리는 순간 집중이 깨질 것이고, 집중이 깨지는 순간 이 검은 실은 그의 진기 전체를 집어삼킬 것임을,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땀이 비 오듯 흘러 옷깃을 적셨다. 이마에서 시작된 식은땀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려 턱 끝에서 뚝뚝 떨어졌고, 가부좌를 튼 두 무릎 아래 흙바닥에는 작은 웅덩이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태호는 그것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그의 세계는 오직 단전 안, 그 좁고 뜨거운 전장뿐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태호는 단전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두 개의 기운을 느꼈다. 하나는 여덟 해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순수한 자신의 진기였고, 다른 하나는 그 순수함을 집어삼키려는 듯 검고 끈적한 이물(異物)이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짐승처럼 얽혀 들었으며, 그 충돌의 여파가 태호의 몸 곳곳으로 번져나가 손끝과 발끝이 새카맣게 죽어가는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순수한 진기는 맑은 시냇물처럼 투명했고, 검은 실은 늪처럼 끈적하고 무거웠다. 물과 늪이 한데 섞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태호는 그 답을 알지 못한 채로, 오직 감(感)에 의지해 두 기운의 경계를 좁혀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천양각 3층의 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그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3층 난간에 걸터앉아 아래 공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흑의(黑衣)를 걸친 노인이었다. 얼굴에는 세월의 깊은 골이 파여 있었으나 눈빛만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고, 그 시선은 오로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여덟 살 소년, 강태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노인의 옷자락은 밤바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저것이…….' 노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이 올 것을 알고 기다려온 사람처럼, 그의 두 눈에는 조급함도, 놀라움도 없었다. 다만 깊은 강물처럼 고요한 관조(觀照)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태호의 단전 안에서 검은 실이 마침내 진기의 심장부에 도달했다.
쩌저적—!
둔중한 파열음이 태호의 뇌리 안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얼음장이 갈라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거대한 나무의 밑동이 부러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순간 태호의 머릿속에는 두 갈래의 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나는 검은 실을 힘으로 짓눌러 밀어내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통째로 끌어안는 길이었다. 전자는 익숙한 길이었으나, 그 끝에는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정체(停滯)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후자는 낯설고 위험했으나,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태호는 그 순간, 검은 실을 밀어내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진기로 그것을 완전히 감싸 안았다. 상극이 아니라 융화(融和)를 선택한 것이다. 이질적인 두 기운이 서로를 잡아먹으려던 싸움을 멈추고, 하나의 소용돌이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마치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를 물어뜯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숨결에서 같은 냄새를 맡고 경계를 풀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순간, 태호의 단전 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용암처럼 솟구쳤다. 전신의 혈맥을 타고 흐르는 진기가 갑절, 아니 그 이상으로 불어난 듯한 감각이었으며, 지금껏 도달하지 못했던 금단(金丹)의 경계가 눈앞에서 서서히 형체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태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형체를 향해 마지막 힘을 짜냈다.
시야가 흐려졌다. 세상의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했고, 눈앞에는 온통 황금빛과 흑빛이 뒤섞인 빛의 파편들만이 소용돌이쳤다. 마치 거대한 강물 한가운데 던져진 나뭇잎처럼, 태호의 의식은 그 소용돌이 속에서 휩쓸리고 또 휩쓸렸다.
'여기서 멈추면 끝이다.'
의식이 흐려지는 그 찰나에도, 태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대신 단전 중심에 자리한 작은 씨앗 같은 것을 향해, 남은 모든 진기를 쏟아부었다. 씨앗은 검은 실의 기운을 삼킨 채 서서히 부풀어 올랐고, 이내 황금빛과 흑빛이 뒤섞인 기묘한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광채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했으며, 한 번 뛸 때마다 태호의 전신으로 뜨거운 파동이 퍼져나갔다.
펑—!
둔탁한 폭음과 함께, 태호의 몸 주위로 진기의 파장이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공터에 깔린 흙먼지가 소용돌이치듯 떠올랐다가 가라앉았고, 근처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인근 담벼락에 앉아 있던 새 몇 마리가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고, 그 파장은 담장을 넘어 천양각 3층 창문까지 닿아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그 파장이 잦아들 무렵, 태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단전 안에서, 처음으로 완연한 금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덟 살의 나이로, 세가의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태호는 단전 깊숙한 곳에서 여전히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검은 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금단 내부, 가장 깊숙한 자리에 마치 뿌리를 내리듯 자리 잡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태호가 정신을 집중해 살펴보려 하면 할수록, 그 실체는 안개처럼 흐려지며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치 손을 뻗으면 뻗을수록 멀어지는 수면 위의 달그림자와 같았다. '이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태호의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성취의 환희와 정체 모를 불안이 동시에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방금 자신이 삼킨 것이 과연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제 자신의 단전은 더 이상 예전의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때, 천양각 3층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내려 왔다.
"제법이구나."
태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3층 난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낡은 창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밤바람 속에 울릴 뿐이었다. '방금, 누가……?' 태호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금단을 이룬 대가로 진기를 모조리 쏟아낸 몸은, 마치 뼈마디가 전부 흐물흐물해진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3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어둠뿐이었다. 방금 들었던 목소리가 환청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누군가 있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그 목소리의 여운만이 귓가에 오래도록 남아, 태호의 마음 한구석에 알 수 없는 불안의 씨앗을 심었다.
그날 밤, 태호는 그렇게 천양각 아래 공터에서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새벽, 태호를 발견한 것은 순찰을 돌던 하인이었다. 하인은 기절해 있는 어린 도련님을 보고 기겁하여 세가 본채로 달음박질쳤고, 그 소식은 삽시간에 강씨 세가 전체로 퍼져나갔다.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회랑을 타고 울려 퍼지자, 잠에서 덜 깬 시비들이 저마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고, 세가의 아침은 그렇게 소란스럽게 시작되었다.
진서연은 아들의 소식을 듣자마자 버선발로 뛰쳐나왔으며, 창백한 얼굴로 축 늘어진 태호를 품에 안고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태호야, 태호야……"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확인하고,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보려 했으나, 손이 떨려 제대로 짚어지지도 않았다. "의원은, 의원은 어디 있느냐!" 그녀의 외침에 시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뛰어갔다.
세가의 어른들 역시 소식을 듣고 하나둘 공터로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걱정 어린 얼굴로, 누군가는 은근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태호를 내려다보았다. 세가의 방계 어른 하나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밤새 여기서 대체 무얼 한 게요……" 그러나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태호는 반나절 만에 눈을 떴고, 의원의 진맥 결과 어디에도 이상이 없다는 소견이 나왔다. 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번이고 다시 맥을 짚어보았으나, 그때마다 같은 답이 나올 뿐이었다. "몸에 이상은 없습니다만……" 의원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의 눈빛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여덟 살 아이의 맥이, 어찌하여 이토록 두텁고 힘찬가. 그러나 그는 그 의문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진서연은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태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품 안에서, 태호는 어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따뜻했다. 지난밤의 그 서늘하고 격렬했던 순간과는 너무나도 다른, 안온한 온기였다. 그러나 그 온기 속에서도, 태호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서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태호 본인만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단전 깊숙한 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마치 깊은 우물 속에 가라앉은 돌처럼, 겉으로는 조용했으나 손을 뻗어 건드리는 순간 다시 파문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는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태호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지난밤 들었던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의 단전 속에 자리 잡은 그 검은 뿌리가 앞으로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지. 아무도 답해줄 수 없는 물음들만이, 여덟 살 소년의 가슴속에 조용히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