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농한 이세계 지주

4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열어보니 마루도 텅 비어 있었다. 부엌 쪽에서 인기척이 있을까 싶어 가봤지만 아궁이는 차가웠고 솥에는 어제 먹다 남긴 죽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새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마당 어딘가에서 나는 낮은 숨소리뿐이었다. 마당으로 나가보니 호랑이만 개집 앞에 앞다리를 뻗고 늘어져 있었다. 늙은 진돗개치고는 덩치가 컸고, 털은 누렇게 바스라진 색이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숨소리가 너무 규칙적이었다.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발목에 남은 작은 이빨 자국 두 개뿐이었다. 아프지 않았다. 그냥 표식 같았다. 손끝으로 눌러봤더니 미열이 살짝 느껴졌다. 상처라기보다는 도장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여기 있었다, 라고 말해주는. 나는 마당으로 나가 대나무숲을 다시 살폈다. 낮이라 그런지 공기의 일그러짐이 훨씬 옅었다. 자세히 봐야 겨우 보이는 정도였다. 뜨거운 날 아스팔트 위에서 보이는 그 흔들림 같은 것. 신경 쓰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정도의 왜곡이었다. 할아버지 말대로 낮에는 잠잠한 모양이었다. 일단 살 곳을 정리해야 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할 시간도, 초자연적인 존재한테 겁먹을 시간도 없었다. 통장 잔고는 정확히 십칠만 원이었고, 그 돈으로 서울 가는 버스비도 안 나올 판이었다. 여기 눌러앉는 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뜻이었다. 나는 마루 밑에서 낫과 삽을 찾아냈다. 손잡이가 삭았지만 쓸 만했다. 날은 무뎠지만 숫돌에 몇 번 갈아내니 그럭저럭 잡초는 벨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나는 마당 가장자리부터 시작해서 안쪽으로 잡초를 베어나갔다. 한 시간쯤 지나자 팔이 저렸다. 서울에서 노동이라곤 알바 계산대에 서 있는 게 전부였던 몸에는 낫질이 고문이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고, 허리는 삼십 분에 한 번씩 펴줘야 했다. 그래도 계속했다. 안 하면 살 곳이 없었다. 호랑이는 그 내내 개집 앞에 누워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개 주제에 팔짱을 낄 수 있었다면 딱 그런 자세였다. 잡초를 반쯤 베었을 때, 눈앞에 낯선 파란 창이 나타났다. '토지 소유 확인. 강원도 OO군 XX리 산 47-1번지, 소유자 김도현.' 창은 반투명했다. 마치 스마트폰 화면을 공중에 띄운 것 같았다. 글씨체는 각이 진 고딕체였고, 배경은 살짝 어두운 파란색이었다. 나는 낫을 놓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헛것을 보나 싶어 눈을 비볐지만 창은 그대로 떠 있었다. '정성 활동 감지: 토지 관리(잡초 제거). 영지경영 스킬 활성화 조건 일부 충족.' 다음 줄이 이어졌다. '조건: 1. 토지 소유 확인 완료. 2. 정성 활동 지속 필요. 현재 활성화율 3%.'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오랫동안, 정말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감각이 다시 올라왔다. 스킬 감정실에서 처음 들었던 그 말. '활성화 조건 미충족.' 그때는 조건이 뭔지도 몰랐다. 감정사는 서류만 뒤적이다가 무성의하게 도장을 찍었고, 나는 등급 외 판정을 받은 채로 감정실 밖으로 밀려나왔다. 그날 이후로 그 말은 내 인생을 요약하는 문구가 됐다. 이제야 그 조건 중 하나를 눈으로 봤다. 토지 소유. 그리고 정성. 3퍼센트라는 숫자가 눈에 박혔다. 우습게 들릴 수도 있는 숫자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뭔가 '진행 중'이라는 표시를 본 순간이었다. 등급 외라는 말은 끝이었다. 활성화율 3퍼센트는 시작이었다.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려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냐." 호랑이였다. 정확히는, 호랑이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나는 개를 내려다봤다. 늙은 진돗개가 앉은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입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과 나오는 소리가 완전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 마치 더빙된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너... 말했어?" "이제 알아챘냐." 호랑이가 하품을 하듯 입을 벌렸다. 이빨이 누렇게 삭아 있었다. 목소리는 사람 것도, 개 것도 아닌, 그 중간쯤 어딘가였다. 굵고, 낡고, 오래 묵은 것 같은 소리였다. "산의 조각이 이 몸에 들어와서 몇 년 됐다. 니 할아버지가 나한테 부탁했지. 이 몸 좀 빌려서 손자 좀 봐달라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개, 아니 개의 몸을 빌린 무언가를 쳐다봤다. 어제 만난 토끼 닮은 작은 것과 같은 종류인 듯했다. 다만 훨씬 오래되고, 훨씬 말이 많았다. 그 토끼는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는데, 이쪽은 처음부터 반말이었고 거침이 없었다. "그 창 봤지." 호랑이가 말을 이었다. "영지경영이라는 게, 원래는 땅을 가진 사람이 그 땅에 정성을 쏟으면 조금씩 힘이 붙는 스킬이다. 근데 대부분 사람은 땅이 없지. 서울 사람들이 무슨 땅이 있냐, 오피스텔 전세도 겨우 사는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스킬 얘기를 하다가 전세 얘기로 넘어가는 낙차가 어이없었다. "그럼 저는요." "넌 있잖아. 산 하나, 밭 조금, 낡은 집 한 채. 니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다 니 이름으로 넘겨놨어. 그러니까 이제 조건 하나는 채웠다는 거지." 호랑이가 앞발로 땅을 긁었다. 발톱이 흙에 세 줄기 자국을 남겼다. "나머지는 정성이다. 여기 계속 살고, 여기 계속 손을 대야 조금씩 올라가." "얼마나 손을 대야 되는데." "몰라. 사람마다 다르고, 땅마다 다르다. 니 할아버지는 오십 년 넘게 여기 살면서 그 정도밖에 못 올렸어." 호랑이가 고개를 돌려 대나무숲 쪽을 봤다. "그러니까 너도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해라." 오십 년. 그 숫자에 잠시 말이 막혔다. 나는 스물넷이었다. 오십 년을 여기서 살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나는 다시 낫을 집어들었다. 손이 저렸지만 이상하게 힘이 났다. 1년 만에 처음으로 뭔가 '된다'는 느낌이었다. F등급, 활성화 미충족, 등급 외. 그 말들이 처음으로 조건부였다는 걸 알았다. 조건을 채우면 등급이 매겨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삽질할 힘이 났다. 오후 내내 잡초를 벴다. 낫이 손에 맞지 않아 몇 번 손을 벴다. 밴드도 없어서 수건 자락을 찢어 감았다. 물집이 터진 자리에 흙이 들어가서 따끔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창이 몇 번 더 떠올랐다. '활성화율 5%.' '활성화율 8%.' 올라가는 속도는 느렸지만, 확실히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숫자가 뜰 때마다 잠깐 손을 멈추고 그 숫자를 눈으로 확인했다. 5퍼센트일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8퍼센트가 뜨자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나 이거, 진짜 되고 있구나. 저녁이 되자 마당의 절반이 정리됐다. 잡초가 사라진 자리에는 흙이 드러났고, 그 흙은 생각보다 검고 부드러웠다. 오래 묵은 땅 특유의 냄새가 났다. 젖은 나무와 발효된 낙엽 냄새가 섞인, 서울에서는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물을 마시며 호랑이를 봤다. 우물에서 떠온 물이었는데, 서울 편의점 생수보다 훨씬 맹맹하면서도 차가웠다. "너 이름이 진짜 호랑이야?" "할아버지가 지어줬다니까. 촌스럽지." 호랑이가 앞발로 눈가를 문질렀다. 사람이 손으로 눈을 비비는 동작이랑 똑같았다. "내 원래 이름은 훨씬 복잡해. 발음도 안 돼." "한번 말해봐." "됐다. 니 입으로는 절대 못 낸다." 호랑이가 코를 킁킁거렸다. "옛날 말이라서, 지금 사람 성대로는 안 나오는 소리야." "그럼 그냥 호랑이라고 부를게." "편한 대로 해라." 호랑이가 몸을 일으켜 개집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일으키는 동작이 늙은 개답게 느릿느릿했다. "내일부터는 밭도 좀 손봐라. 창고도 고치고. 정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빨리 올라간다. 대신..." 호랑이가 잠시 말을 끊었다. 개집 안에서 눈만 빛나고 있었다. "대신 뭐." "활성화율이 올라갈수록 게이트도 반응이 커진다. 저쪽에서 이쪽 기운을 느끼거든. 좋은 것들만 오는 게 아니야." 나는 대나무숲 쪽을 봤다. 낮인데도 그 일그러진 공기가 아까보다 조금 더 짙어 보였다.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해가 기울면서 그늘이 길어지고 있었고, 그 그늘 속에서 대나무숲의 왜곡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어제 그 발자국 낸 거는 뭐였어." "몰라도 된다." 호랑이가 짧게 답했다. 알려줄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짜 모른다는 투였다. "니 할아버지가 몇 년간 막아놓은 것들이 하나둘 기어 나오는 거야. 니가 여기 살면서 정성을 쏟을수록, 그것들도 이쪽으로 오는 길을 더 잘 찾게 된다." '좋아졌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힘을 얻는 대가로 위험도 같이 커지는 구조라니, 이런 걸 두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도 없었다. 통장 잔고 십칠만 원짜리 인생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침대가 아닌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편하게 잠들었다. 이불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살짝 났지만, 몸은 고단했고, 마음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달빛과, 그 달빛 아래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호랑이의 실루엣이었다. 다음 날 아침, 마당에 나가보니 대나무숲 앞 흙바닥에 발자국 하나가 찍혀 있었다. 인간의 발자국은 아니었다. 크고, 발톱 같은 게 세 개 파여 있었다. 발자국의 깊이만 봐도 무게가 상당한 것이 지나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 그 발자국을 손가락으로 만져봤다. 흙이 아직 덜 말라 있었다. 밤사이, 그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에 뭔가가 여기까지 다가왔다가 되돌아갔다는 뜻이었다. 호랑이는 개집 안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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