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사무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들 자기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고, 박태준 부장은 여느 때처럼 늦게 출근해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넘겼다. 아무도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당연하지. 이걸 누가 알아.
내가 어제 하얀 공간에 다녀왔다고, 금발의 여자를 만났다고, 그 뒤로 외국어가 다 읽힌다고 말하면 누가 믿을까. 정신병원 예약이나 잡히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어제 박 부장이 던져준 계약서 초안이었다. 영문으로 된 라이선스 계약서. 원래대로였다면 사전 붙잡고 밤새워야 할 분량이었는데, 지금은 눈으로 스치기만 해도 뜻이 그대로 흘러들어온다. 신기하다기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혹시나 싶어서 옆자리 대리님이 보던 일본어 계약 관련 메일도 슬쩍 흘겨봤다. 역시나. 뜻이 그냥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누가 보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 같았다.
박 부장이 지나가다 내 모니터를 힐끗 보고는 한마디 던졌다.
"정민호 씨, 그거 오늘 오전까지 끝내놔."
"네, 부장님."
"어제도 늦게까지 있었다며. 몸은 괜찮고?"
괜찮냐고 물어보는 건지, 안 괜찮아도 어차피 시켜야 되니까 묻는 건지 헷갈렸다. 목소리에 걱정이라곤 한 톨도 안 담겨 있었으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래, 젊을 때 좀 굴려야지."
부장은 그 말을 던지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속으로 육포처럼 씹어 먹히는 기분이었다. 하이에나 무리 속에 떨어진 톰슨가젤이 딱 이런 심정 아닐까.
점심시간, 나는 구내식당 대신 옥상으로 올라갔다. 혼자 있고 싶었다. 어제 일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어지러웠다. 이게 진짜 내 몸에 생긴 일이 맞는 걸까. 아니면 과로로 헛것을 본 걸까. 그런데 헛것을 봤다고 해도, 실제로 외국어가 읽히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옥상 문을 열자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나는 난간에 기대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사람들이 개미처럼 오가고 있었다.
"정민호 씨?"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윤서연이었다. 같은 팀 동료였고, 나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회사에서는 나보다 처리 속도가 빨랐다. 늘 침착하고 정리된 말투로 사람을 안심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안색이 왜 이래요? 밤새셨어요?"
"티 나요?"
"완전. 눈 밑이 시커먼데."
서연이 캔커피를 하나 건넸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받아 들었다. 손이 차가웠다. 나는 그게 신경 쓰였다.
"박 부장님이 또 뭐 던지셨죠?"
"어떻게 알았어요?"
"뭘 몰라요. 매번 그러시잖아요."
서연이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댔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흩날렸다.
"저번엔 저한테도 그러셨어요. 금요일 저녁에 갑자기 발표자료 만들라고. 다음날 아침 회의에 쓸 거라고."
"진짜요?"
"네. 그날 밤 열두 시까지 붙어 있었어요. 그때 진짜 사표 쓰고 싶었어요."
"왜 안 쓰셨어요?"
"쓸 배짱이 없었죠. 그리고 그다음 달 카드값 생각하니까 도저히."
"고생하셨네요."
"고생은 정민호 씨가 더 하시는 거 같은데."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눈빛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하고 달았다.
"저... 서연 씨."
"네?"
"이상한 얘기 하나 해도 돼요?"
"뭔데요, 갑자기."
말을 꺼낼까, 말까.
말하면 이상한 사람처럼 볼까?
그래도 누군가한테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혼자 끌어안고 있기엔 너무 무거웠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결국 입이 먼저 열렸다.
"제가 어제, 회사에서 잠깐 졸았는데요. 그때 이상한 곳에 갔었어요."
"이상한 곳이요?"
"하얀 공간이요. 거기서 어떤 여자를 만났어요. 금발이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서연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웃지도, 놀리지도 않았다. 그냥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나는 그 반응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비웃으면 그냥 웃고 넘기면 될 텐데.
"그 여자가 저한테 실수했다고 했어요. 그 뒤로 이상한 문자들이 읽혀요. 외국어도 다 이해되고요."
"진짜요?"
"진짜예요. 어제 코피도 났는데, 그 뒤로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어요. 밤새 야근했는데 피로가 다 사라진 것처럼."
"방금 아까 부장님 계약서도 그거 때문에 그렇게 빨리 본 거예요?"
"네. 원래는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야 되는 분량인데, 그냥 눈으로 스치기만 해도 뜻이 들어와요."
서연은 잠시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괜히 말한 건가 싶어 후회가 밀려왔다. 눈치를 보며 캔커피 뚜껑만 만지작거렸다.
"...믿기 힘든 얘기죠?"
"아니요."
서연이 고개를 저었다.
"믿어요."
"진짜로요?"
"민호 씨가 이런 얘기로 장난칠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했다. 눈물이 차오르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왜 이런 걸로 눈물이 나려는지,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누군가 내 말을 진짜로 들어준다는 게 이렇게 큰 위로가 될 줄 몰랐다.
"그럼 지금도 그 능력, 있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확인해볼까요?"
서연이 휴대폰을 꺼내 검색을 하더니, 한자로 된 옛 시조 하나를 화면에 띄웠다.
"이거 읽을 수 있어요?"
화면을 봤다. 낯선 한문투 문장이었다. 획도 복잡하고 처음 보는 글자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뜻이 그대로 들어왔다.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던 언어처럼.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마음도 흔들린다는 뜻이네요."
서연의 눈이 커졌다.
"대박."
"진짜죠?"
"이거 저도 몰랐던 옛 한시인데, 어떻게 알아요? 저 국문과 나왔는데도 처음 봐요, 이 시."
"모르겠어요. 그냥... 읽혀요."
서연은 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이 비밀을 나눈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심이 됐다. 혼자 짊어지고 있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세요."
"당연하죠. 누가 믿겠어요, 이런 얘기."
"서연 씨는 믿잖아요."
"저는 좀... 그런 거 좋아해서요. 판타지 소설도 많이 읽었고."
서연이 웃었다. 그 웃음이 진짜 오랜만에 본 편안한 웃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근데 코피 났던 건 좀 걸리네요."
"네?"
"능력에 부작용 있는 거 아니에요? 그냥 좋은 것만 있으면 이상하잖아요. 만화에서도 항상 그렇던데."
서연의 말이 맞았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게 아니었다. 다만 애써 무시하고 있었을 뿐. 좋은 게 생겼다는 기쁨에 취해서, 대가가 있을 거란 생각은 구석으로 밀어놨었다.
"조심해서 써봐요. 무리하지 말고."
"네. 그럴게요."
바람이 다시 불었다. 서연의 캔커피 뚜껑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어쩐지 그 순간부터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때, 서연이 갑자기 손을 짚으며 휘청거렸다.
"어? 서연 씨?"
"아, 갑자기 좀 어지러워서..."
그녀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난간에 부딪히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힘이 부족해서 같이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둘 다 바닥에 주저앉는 정도로 끝났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좀 놀라서..."
그런데 그녀의 손목을 잡은 내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아까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마치 손바닥 안에서 뭔가가 흐르고 있는 느낌.
이거 또 뭐야.
서연의 무릎에 살짝 까진 상처가 보였다. 넘어지면서 난간에 긁힌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보는 순간, 상처 주변으로 옅은 빛이 스며들었다.
뭐야, 이거.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었다. 마치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피가 살짝 배어 나오던 자리였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없었다.
서연이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며 눈을 크게 떴다.
"...민호 씨. 이거."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이게 대체 어디까지 가능한 건지, 나조차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