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이거... 방금 나은 거예요?"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내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이 여전히 뜨거웠다. 마치 방금 전기장판 위에 손을 얹었다가 뗀 것 같은 열기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 쿵. 쿵. 마치 누가 내 가슴 속에서 북을 치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이렇게..."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방금 서연의 손등에 벌겋게 부어오르던 상처가, 내 손이 닿는 순간 스르륵 사라졌다고? 그걸 누가 믿겠는가.
"이거 완전 판타지잖아요."
서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웃음 끝에 걱정이 섞여 있었다. 웃음과 걱정이 한 얼굴에 동시에 떠 있는 게, 신기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갑자기 하얘졌는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나는 손을 뻗어 벽을 짚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방금까지 상쾌했던 몸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뭔가 몸속에서 배터리 잔량 표시가 100퍼센트에서 5퍼센트로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어지러워요."
"민호 씨!"
서연이 나를 부축했다. 눈앞이 흔들렸다. 사물의 경계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마치 배터리가 순식간에 방전된 느낌이었다. 아니, 방전이라는 표현도 부족하다. 케이블을 통째로 뽑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렇구나.
힘을 쓰면 대신 뭔가 소모되는구나.
그때, 어제 그 여자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실수했어요.
조금 달라져 있을 거예요.
이게 그 대가였나. 조금 달라져 있을 거라던 그 말이, 이런 식으로 청구서를 내밀 줄은 몰랐다.
"물 좀 마셔요."
서연이 자기 텀블러를 건넸다. 나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물이 이렇게 고마웠던 적이 있었나.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이거... 계속 쓰면 위험한 거 같아요."
"어떤 식으로요?"
"쓸 때마다 몸이 뭔가... 갈려나가는 느낌이에요."
서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텀블러 뚜껑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함부로 쓰면 안 되겠네요."
"네. 근데..."
나는 말을 삼켰다. 이걸 말해도 되나. 그냥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어느 쪽이 맞는 걸까.
"근데 뭐요?"
"방금 서연 씨 다친 걸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나갔어요. 제 의지랑 상관없이."
서연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놀람과 미안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그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뭐가요?"
"의지랑 상관없이 나가면, 나중에 정말 위험한 순간에 몸이 못 버틸 수도 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연의 말이 옳았다. 이 힘이라는 게, 필요할 때 켜고 끄는 스위치 같은 게 아니라면. 정작 진짜 위험한 순간에, 몸이 배터리 부족으로 꺼져버린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오후 업무 시간,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억지로 버텼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에도 평소보다 힘이 더 들어갔다. 마치 물속에서 타이핑을 하는 기분이었다. 서연은 몇 번이나 내 쪽을 살피듯 눈짓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습관이었다.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그게 나라는 사람의 기본값이었다.
퇴근 무렵, 박태준 부장이 다시 나를 불렀다.
"정민호 씨."
"네, 부장님."
"어제 그 계약서 검토, 다 됐어?"
"...네, 다 했습니다."
밤새 정리한 자료를 건넸다. 부장은 대충 넘기며 훑어봤다. 종이를 넘기는 손짓이 마치 시장에서 배추를 고르는 것 같았다.
"음, 나쁘지 않네."
칭찬치고는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나쁘지 않다는 말이 마치 은혜를 베푸는 듯한 어조로 들렸다. 밤을 새워 정리한 자료에 대한 평가가 딱 저 세 글자라니.
"근데 이거 문자, 여전히 이상한데."
"...협력사 원본이라니까요."
"뭐, 아무튼. 잘했으니 봐줄게."
봐줄게. 그 말이 유독 거슬렸다.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봐준다니. 마치 내가 시험이라도 통과해서 목숨을 건진 사람 같은 어조였다.
"아, 그리고."
부장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그 낮춰진 목소리에서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확 밀려왔다. 이런 톤으로 말할 때마다 좋은 소식이 나온 적이 없었다.
"오늘 저녁, 회식 있는 거 알지?"
"...회식이요?"
"거래처 접대 있어서 다 참석해야 해. 팀 전체."
"저도요?"
"당연하지. 서연 씨도 데려와."
서연 씨를 데려오라니.
뭔가 기분이 나빴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안개 속에서 뭔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데, 그 형체가 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일곱 시, 강남 쪽 룸살롱 근처 식당이야. 문자로 주소 보낼게."
룸살롱 근처. 그 말이 귀에 콱 박혔다.
부장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서연의 자리 쪽을 봤다. 그녀도 이미 통보를 받은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거 안 가면 안 돼요?"
서연이 다가와 작게 물었다. 목소리에 짜증과 불안이 반씩 섞여 있었다.
"모르겠어요. 매번 이런 자리는 좀..."
"저번에도 이상한 사람들 데려와서 술 먹이고 그랬거든요."
"이번엔 저도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게 걱정이에요."
서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민호 씨는 무리해서 나서는 성격이잖아요."
그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항상 그랬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면, 앞뒤 안 가리고 몸이 먼저 나가는 타입. 오늘 낮에도 그랬지 않은가. 생각도 하기 전에 손이 먼저 서연에게 뻗어 있었다.
"괜찮을 거예요. 그냥 자리만 지키다 오면 되죠."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나조차 확신이 없었다. 방금 겪은 이상한 능력, 그리고 그로 인한 후유증.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이 상태로 회식이라니. 배터리 5퍼센트짜리 스마트폰을 들고 야외 활동을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강남으로 향했다. 지하철 안에서 몇 번이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손잡이를 붙잡고 서 있는데도 몸이 좌우로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서연이 옆에서 팔을 붙잡아 줬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게 습관이었다. 힘들어도, 아파도, 무너질 것 같아도 일단 괜찮다고 말하고 나서 그 다음을 걱정하는 것. 그게 정민호라는 인간의 기본 소양이었다.
지하철 창밖으로 지나가는 불빛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힘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초능력이라기엔 너무 초라하고, 저주라기엔 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은 이 몸뚱이 하나 제대로 가누는 게 급선무였다.
식당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낯선 사람들 몇몇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거래처 사람들이라기엔 분위기가 이상했다. 문신이 살짝 보이는 팔뚝, 거친 말투, 무언가 위험한 기운이 흘렀다.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 정장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마치 급하게 빌려 입은 옷 같았다.
박태준 부장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 왔어? 이쪽으로 와."
자리에 앉으며,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거 그냥 접대 자리가 아닌데.
식탁 위에는 이미 빈 술병들이 즐비했고, 사람들 목소리는 벌써 커져 있었다. 마치 회사 회식이 아니라 어떤 다른 세계의 모임에 잘못 초대된 느낌이었다.
서연도 옆에서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술병이 벌써 여러 개 비워져 있었다. 낯선 남자 하나가 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웃었다. 그 시선이 스캐너처럼 서연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어, 아가씨 예쁘네."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