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과천경마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 나는 창밖을 보며 계속 머릿속으로 경주 순서를 정리했다. 좌석에 앉아 흔들리는 버스의 진동을 느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3월 초 토요일 경주표를 몇 번이나 다시 그려보고 있었다. 오십 년 가까이 살아온 기억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듬성듬성한 법인데,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그 듬성듬성함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5경주.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건 딱 그 경주 하나였는데, 그 경주에서 배당률이 거의 무시당하던 말 한 마리가 압도적인 차이로 우승했던 걸 나는 아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저 그때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그 경주 이야기를 하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던 걸, 오십 평생 내내 잊지 않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사람 기억이라는 게 참 얄궂다. 정작 중요한 건 다 까먹으면서, 이런 술자리 안줏거리 같은 이야기는 뇌 한구석에 콱 박혀서 안 사라지니 말이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이 세계로 넘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도박판에 발을 들이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스쳤지만, 통장에 삼만 이천 원이 찍혀 있던 강도현이라는 대학생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건 도박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경마장에 도착하자 나는 조금 긴장했다. 이 세계의 경마장 풍경이 원래 내가 알던 것과 같을지, 아니면 뭔가 다를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배당 구조 자체가 다르거나, 경주 자체가 아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내 기억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관중석과 배팅 창구, 전광판까지 전체적인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고, 나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다만 관중의 성비가 뒤바뀌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여자였고, 남자는 소수였는데, 그 소수의 남자들도 대체로 여성 동행인 옆에 붙어 조용히 앉아있는 모양새였다. 이 세계에 넘어온 뒤로 여러 번 느꼈던 이질감이었지만, 경마장이라는 이렇게 남성적인 공간에서까지 그 비율이 뒤집혀 있으니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세상 참 어디를 가도 똑같지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배팅 창구로 다가가 신중하게 오만 원을 5경주 우승마 단승에 걸었다. 창구 직원이 별 감흥 없이 배팅권을 뽑아 내미는 걸 받아 들면서, 나는 손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이건 단순한 도박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만약 이게 틀린다면 나는 이 세계에서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셈이었고, 반대로 이게 맞는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배팅권을 받아 쥐고 나는 관중석에 앉아 경주를 기다렸는데,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전광판에 뜨는 다음 경주 안내 자막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는지 모른다. 옆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 몇몇이 마권을 들고 수다를 떠는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을 만큼 나는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말들이 튀어나갔다. 내가 걸었던 말은 초반에 중위권에서 밀려있었는데, '설마 이번엔 다른가' 하는 불안이 스쳤다. 기억이라는 게 원래 세월이 지나면서 왜곡되기도 하고, 어쩌면 내가 다른 경주를 착각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순식간에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후반 직선 코스에 들어서면서 그 말이 갑자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다른 말들을 하나씩 제치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눈에 들어왔고, 나는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채로 그 장면을 지켜봤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전광판에 그 말의 번호가 1착으로 뜨는 걸 확인했을 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옆자리 아주머니가 흠칫 놀라 나를 쳐다볼 정도였다.
"...이게 되네?"
나는 배팅권을 손에 쥐고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종이가 구겨질 정도로 꼭 쥐고 있다가, 이러다 정말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겠다 싶어서 얼른 지갑 속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배당률이 무려 십오 배였는데, 오만 원이 순식간에 칠십오만 원으로 불어난 셈이었다. 오십대까지 온갖 실패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의 성공이 주는 쾌감이 얼마나 짜릿한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는데, 그 앎에도 불구하고 이번 순간은 유독 다르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이건 단순한 운이 아니라, 내가 가진 기억이 실제로 이 세계에서 유효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로또를 맞은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흥분이었다. 로또는 그냥 운이지만, 이건... 내가 가진 정보력, 그것도 오십 년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은 정보력이 실제로 힘을 발휘한 결과였다.
환전 창구로 향하며 나는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만약 다른 경주들의 기억도 이렇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면, 이건 단순히 용돈벌이 수준이 아니라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 기억이라는 게 무한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95년의 모든 경주 결과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몇몇 경주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손가락으로 대충 세어봐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경주는 열 손가락에 다 못 채울 정도였다. 그 기억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써야 할지, 나는 벌써부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한 번에 다 써버리면 의심을 살 수도 있고, 배팅 규모를 너무 크게 잡으면 창구 쪽에서도 눈여겨볼 수 있으니, 적당히 나눠서 조금씩 불려나가는 게 맞겠다는 계산이 섰다. 요컨대 이건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처럼 굴려야 하는 자산이었다.
칠십오만 원을 손에 쥐고 경마장을 나서는 길,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오십대의 나로서는 이 정도 돈이 결코 큰돈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몸, 통장에 삼만 이천 원이 있던 강도현이라는 대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거의 로또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한 달 생활비를 몇 번이나 해결할 수 있는 돈이었고, 어쩌면 이걸 밑천으로 뭔가 더 큰 걸 시작할 수도 있었다. '이걸로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조금씩 그려보기 시작했다. 당장 통장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돈을 어떻게 굴려야 이 세계에서 내가 살아남는 데 가장 유리할지, 그게 더 중요한 문제였다. 학비, 생활비,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할 비상금까지... 오십대 인생을 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돈은 있을 때 잘 굴려야 없을 때 안 죽는다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도 나는 계속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다음에 기억나는 경주가 언제였는지, 그 사이에는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이렇게 혼자서 뭔가를 계획하고 있는 동안, 학교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그 무렵, 학교에서는 이미 다른 종류의 파장이 일고 있었다. 학과 간사장 김서연은 동아리방에 모인 몇몇 여자 선배들과 함께 회의랍시고 모여있었는데, 안건은 다름 아닌 신입생 강도현에 관한 것이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그날 동아리방 분위기가 제법 진지했다고 한다. "그 신입생, 좀 이상하지 않아요" 하고 한 선배가 말을 꺼냈고, 다른 선배가 "뭐가요" 하고 묻자, "정하은 선배가 그렇게 들이댔는데도 전혀 안 흔들리던데, 그것도 신기하고"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하은이라면 학과 내에서도 인기가 많기로 유명한 선배였으니, 그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소문거리가 된 모양이었다.
"안 흔들린 게 아니라 당황했던 것 같은데요" 하고 김서연이 정정했지만, 다른 선배는 "아니, 그 표정 봤어요? 나름 여유 있어 보였는데" 하며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또 다른 선배가 끼어들어 "저는 그냥 순진해서 뭔지 모르는 거 같던데" 하고 다른 의견을 냈지만, 이미 분위기는 강도현이라는 신입생을 두고 이런저런 해석을 붙이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강도현이라는 신입생은 어느새 "묘하게 매력적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었는데, 물론 나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줄도 몰랐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진땀을 뺐을 것이다. 오십대 아저씨의 정신머리를 가진 채로 이십대 초반 여자애들 사이에서 그런 평가를 듣는다는 건, 상상만 해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일이었으니까.
김서연은 회의 말미에 팔짱을 끼고 짧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쨌든, 지켜봐야 할 것 같긴 하네요." 그 말에 다른 선배들도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고 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지켜보겠다는 건지, 그 의미가 단순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조차 명확히 하지 않았다는 게 나중에 들은 후일담이었다.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나중에서야 조금씩 드러나게 될 일이었다. 다만 그날의 나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른 채, 칠십오만 원이라는 종잣돈을 손에 쥐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데만 골몰해 있었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경마장에서만 찾으려 했지, 내 주변에서 이미 조용히 소용돌이치고 있던 다른 종류의 위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